그림자
좁고 음침해 보이는 길이었다.
코트 차림인데도 등이 시렸다로 시작하는 첫 장을 펼치는 순간
알아차렸다.
브레이크 고장난 자동차에 올라탔구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로 개업한 칼국수 식당에서
경희씨와 쭈꾸미볶음을 점심으로 먹었다.
혀의 반응이 소극적이었던 터라 덜 매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뱃속 장기들의 반응은 호들갑스럽다.
길거리 배회를 포기하고 들어와
배에 담요를 두르고 커다란 쿠션에 등을 대고 앉았다.
준비 끝.
한두 페이지 정도 간만 본 뒤 외출했을 뿐인데
내내 머릿 속에는 이 책 생각 뿐이었다.
물 마시러 두어 번 일어서고
잠자리에 들기위해 샤워한 시간 말고는 줄곧 읽었다.
저녁 약속이 있다는 남편의 전화는 가뭄의 단비인양 반가웠다.
오후 2시 조금 넘은 시간 다시 첫장부터 시작해
밤 12시즈음 600쪽에 달하는 제법 묵직한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오랜만에 만찬을 즐긴 영혼과는
달리 뒤늦게 저녁을 건너뛰었다는 걸 알아차린 위장이
죽는 소리를 했지만 무시했다.
이래저래 꿈자리가 흉흉했다.
통제 불가능한 원초적 사랑같은 게 추리소설의 매력이다.
시작을 안 했으면 모를까 일단 시작을 했다면 어쨌든 끝은 봐야한다.
추리소설의 늪에 한번 빠지면 세월에 좀이 쓰는지 도끼자루가 썪는지 모른다.
이 책을 서둘러 읽을 수 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이유.
스토리의 블랙홀급 흡입력 말고도
최근 집안에 들어와 똬리를 틀고 앉은 내 사랑스런 천적 피오나,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고 간신배보다 더 얄미운,
책 읽는 중간중간 슬그머니 옆에 다가와 동생이 왜 추락했는지 알아?
으흥! 그 남자는 아니고...그래서 범인이 누구냐면...
엄마 놀리는 건수 하나 찾아낸 얍삽한 스포일러 딸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