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

그립다, 할매 친구들.

타박네 2016. 1. 12. 12:49

삽십대 중반,

길거리 수다장에 데뷔하며 얻은 가장 큰 소득이라면 단연 할매친구들이다.

강언덕에서 뱃터 내려가는 길 왼쪽으로 자그마한 경로당이 하나 있긴 하지만

그곳은 주로 할아버지들께서 장기나 바둑을 두며 소일하는 공간이었다.

할아버지들 담배 냄새를 피해 나오신 할머니들은

한뼘 그늘이 있는 자리라면 길가, 아파트 화단 가리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오가는 차량들과 사람 구경으로 반나절쯤 떼우고 들어가셨다.

어느 날 퇴근 길,

박스나 신문을 깔고 오종종 앉아 계신 모습을 본 남편이

뚝딱거리며 평상 하나를 만들더니

내 키보다 조금 더 큰 라일락 나무 아래 놓아드렸다.

그 평상은 뒤집어 씌운 비닐장판이 너덜너덜 헤질 때까지

어머니를 비롯해 동네 어르신 서너 분의 간이 경로당 노릇을 충실히 해냈다.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석 같았던 그 자리를

젊은 새댁들 몇몇은 불편해 하기도 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가끔 장바구니 검열을 당하기도 하고

어머님 사주를 받은 게 분명한 어르신으로부터

달랑 하나뿐인 딸아이 동생 계획은 언제쯤이냐는 추궁을 받고는

칼 쓴 춘향이마냥 모가지 길게 빼고 서서

오도가도 못하고 난감해 미칠뻔 하기도 했었다.

한번은 트럭에서 엄청 씨알이 굵어 뵈는 마늘 한 접을 사들고

의기양양 들고 오다가 할매들 눈에 딱 걸렸다.

아, 물론 나는 칭찬을 들을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날아든 소리는 이따구 걸 마늘이라고 사왔느냐

작아도 육쪽이 똑똑 떨어져야 썩지 않고 오래 가고 까먹기도 수월하지

서양놈 뭐마냥 크기만 디립따 크지

이거 봐라 짜잘한 잔챙이들이 들러붙어 어디 먹잘거나 있나 

크다고 다 장땡인줄 아느냐로 시작된,

어머니한테도 안 들어본 잔소리 아홉 마당을 듣다가

결국 들키지 않을 정도로 눈물까지 찔꼼 흘리고 말았는데

남의 집 귀한 메누리 입이 댓발 튀어나왔거나 말았거나 할매들,

부려놓은 마늘을 일일이 쪼개고 다듬느라 손도 입만큼이나 바빴다.

 

간혹 장 보러 나갈 때 평상에 앉아 노시는 할매들이 몇 분인가 눈여겨 봐뒀다가

빵이며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와

많은 것 중에 서너 개 꺼내드리는 양 내놓고는 꽁지 빠지게 뛰어들어가면

누구오메야! 니도 같이 먹자 하는 소리가 현관문 닫을 때까지 따라오곤 했다.

더러는 못 이기는 척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이밀기도 했다.

그런 날은 할매들 맛깔난 이바구에 도끼자루가 썩는지

가스렌지에 삶던 빨래가 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할매들 이야기 중에는 약방 감초처럼 입에 착착 감기는 욕들이 많았다.

나는 그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욕 한 마디 더 얻어먹겠다고

턱받치고 앉아 되도않은 말을 씨부리기라도 할라치면 

문디 옻낭구 올라가는 소릴랑 그만하라는

할매 호령이 떨어지고 그러면 나는 날아가는 참새 뭐라도 본 듯

꺽꺽 우는 소린지 웃는 소린지 헷갈리는 괴성을 지르며

좋다고 박수를 치곤 했다.

문디 옻낭구 올라가는 소리란 지금으로 말하면

응팔의 덕선이가 서울대 수석입학 하는 소리쯤으로 해석하면 된다.

진심 나는 그분들의 훌륭한 욕 제자가 되고 싶었다.

 

욕만큼 간결하고 직설적인 감정표현은 없다.

지금 나는 너를 증오하고 있으며 네가 불행해지길 바랄 뿐만 아니라 

가장 고통스럽게 죽기를 바란다란 장황한 말 대신

염병하네 한 마디면 족하다.

그 말뜻은 이렇다.

내가 미워하는 그대가  장티푸스에 걸려 칠팔월 삼복더위에도 불구하고 

땀 한 방울 못 흘리고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무시무시한 저주다.

하지만 보인다.

욕 속에 담긴 신산했던 그분들의 삶.

치료약 없는 질병이 얼마나 두려웠을 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소설 태백산맥과 영화 황산벌의

질펀하고도 원색적인 남도 욕까지는 감당할 자신 없지만

가끔 참을성 있는 대화 대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도 치명적인 욕 한방을 날리고 싶을 때가 있다.

요즘같은 욕 부르는 세상에선 더 그렇다.

내 욕쟁이 할매친구들이 그리운 겨울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