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채식주의자
텃밭에서 솎은 상추를 볼이 미어터지게 욱여넣던 날,
기어이 입술 안쪽 살까지 잘근 깨물었다.
소스라칠 정도의 통증은
이 사이에서 짓이겨져 흘러나온 푸른즙의 희열로 금새 진정되었다.
상처라는 게 그런 건가 보다.
나는 그저 실수로 살짝 깨물었을 뿐인데
정작 여린 속살의 상처는 깊어서 더디 아문다.
탐욕스럽게 상추쌈을 먹어치우던 그날 이후
점점 심해지는 통증 때문에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결국 병원에서 소염진통제 처방과 함께
고문과도 흡사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럴 때 꼭 듣게 되는 말이 있다.
차라리 고기를 좀 먹지,얼마나 고기가 땡겼으면 그랬겠어,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고기를 좀 먹어...
그러게 말이다.
내 살 뜯어 먹을 지경이면 남의 살이라고 못 먹을까.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늘 말해왔지만 무슨 거창한 의미가 있어 육식을 기피했던 건 아니다.
생선을 포함한 일체의 고기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은
채 열 살도 되기 전이었느까.
그러니 무슨 의미를 두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는 뜻이다.
돌이켜 생각하니 시작은 단순한 식성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감의 문제였다.
밥상머리에서 벌어지던 노골적 차별에 대한 반항으로
어린 나는 육식거부를 택했다.
아무도 이유를 알려 하지 않았고 걱정하지도 않았으므로
특별히 불편할 것도 없었던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담장이 낮은 집 마당에서
허공을 찢는 날카로운 돼지의 비명이 들리자
작은 아이 하나가 놀라 소리쳐 울면서 대문 밖으로 뛰어나가는 기억 속 영상.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들도록 식성이 바뀌지 않자
어느 날 어머니는
어릴 때 네가 동네에서 돼지 잡는 걸 보고 많이 놀라더니...하셨다.
문득문득 떠오르던 그 장면은 꿈이 아니었다.
그 이름이 메리였는지 케리였는지 아니면 독구였는지는 모르겠는 누렁이 한 마리.
당시 우리 동네에서는 어디서 주워들은 미국인 이름을
개에게 붙여주는 게 유행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만 봐도 좋다고 꼬리를 풍차처럼 흔들어대
밥값도 못한다며 구박받다 끝내 개장수 자전거에 실려간 그 누렁이,
어설피 부러뜨려 목이 꺽인 채 마당을 뛰던 닭,
강물에 폭약을 터뜨리자 허옇게 배를 뒤집으며 떠오르던 팔뚝만한 잉어떼들.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그 모든 생명들과 내가 오버랩되면서
육식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던 때도 있었다.
신산한 삶은 여러 형태로 마음에 상처를 남겼고 육식 거부는 그 중 하나였다.
어쩌다 채식주의자가 되었으므로
어쩌다 눈알 뺀 남의 살을 야곰야곰 먹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영양 불균형으로 일찌감치 얻어걸린 각종 노인성 질환에도 꿋꿋하게 버티다가
조개류 갑각류 등에 입을 댄 것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부터다.
웰빙이니 뭐니 하며 채식에 대한 인식이 고조된 요즘 세상 이전,
어디 모임에라도 나가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하면
마치 외계인 보듯 하거나 안쓰러워들 했다.
사람들 속에 섞여 즐거움을 찾게 되면서
그 시선들은 노인성 질환보다 더 불편했었다.
어느덧 나는 남의살 마니아들 틈에서도
그다지 표나지 않는 짝퉁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움푹 패인 입 안 상처의 빠른 회복을 위해
최근들어 불타는 낙지며 쭈꾸미 볶음을 자주 먹었다.
매운 양념이 상처를 할퀴면 저절로 눈물이 찔끔 나오기도 하는데
상처의 고통이라는 게 또 그렇다.
고통은 더 독한 고통 앞에서 무디어지고 잊혀지더라고,
벌건 가학성 음식을 꾸역꾸역 두세 번 씹어 넘기다보면
뭐가 더 독한지 헷갈리면서
이거나 저거나 고통는 다 거기서 거기같은
그래서 정말 별 거 아닌 것 같은
감각신경의 혼란 상태에 빠진다.
그러면 나는 접신의 순간 작두 타는 무당처럼 때는 이때다,
후다닥 남은 양념에 밥까지 볶아 먹어치운다.
남의 다리 단백질 덕분인지 고문기술자 '알보칠' 덕분인지
아무튼 이제는 다 나았다.
세계 3대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며
단박 화제에 오른 한강의 '채식주의자'.
내가 이 책을 구입해 읽은 날짜를 보니 2008년 11월25일.
수상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한 번 더 읽어봤다.
그리고 책 내용과 아무런 관련 없는 짝퉁채식주의자의 넋두리.
어제 저녁 친구 여운이 시골동네로 치면 제법 야심한 시간에
우리 집 앞에 있노라며 불러낸다.
컴컴해 잘 보이지도 않는 텃밭에 데리고 가서
무성한 수레국화며 꽃양귀비 자랑을 한바탕 하고
카페 온실에서 차를 마셨다.
내가 커피를 주문하자 잠은 어떡하려고 이밤에 커피냐며 쓴소리를 한다.
너 이제 오늘 밤 꼴딱 샌다,장담 했지만 여운이 네가 틀렸다.
베란다 연통을 타고 흐르는 빗물소리를 들으며 잠만 잘 잤다.
요즘 내 주식은 상추쌈이다.
매일 질좋은 수면제를 복용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짝퉁 채식주의자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