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일기

텃밭일기11

타박네 2016. 7. 24. 20:11

 

             허리병이 도진 이후 줄곧 무기력합니다.

              헛되고 헛되니 헛되도다병까지 도질까봐 부지런히 손과 발을 놀려보지만

              뒤따르는 건 두통과 불면의 밤입니다.

              후텁하고 습한 날씨탓도 있을 겁니다.

              산에 가는 것도 밭에 가는 것도 더럭 겁부터 납니다.

              꽃탐사는 우선 저만치 미뤄뒀죠.

              텃밭은 표나지 않게 살금살금 드나들었습니다.

              하지만 토마토나 가지 호박을 따오는 것 말고는 아무짓도 하지 않았죠.

              텃밭 접근금지령을 내린 남편의 말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이번 허리통증이 그만큼 죽을 맛이었던 겁니다.

              오늘 아침 남편이 낫을 찾아들고 나설 차비를 합니다.

              텃밭관리를 해주겠노라 약속했거든요.

              대신 저는 집에 있으랍니다.

              데리고 가지 않으면 따로 뒤따라 가겠다고 찍자붙었죠.

 

              그렇게 공식적으로 텃밭을 밟았습니다.

              호랑이 출몰하게 생겼던 골목길이 잠깐 낫질에 훤해집니다.

              흩뿌리던 비가 어느결에 장대로 변하고 먼데서 천둥까지 으르렁거렸지만

              탄력 붙은 남편의 낫질은 멈추질 않았습니다.

              옆에서 우산을 받쳐줘봤지만 소용없었어요.

              흐른 땀으로 벌써 물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돼버렸거든요.

              힘들어?하고 물으니 그럼 안 힘들겠냐? 되묻습니다.

              말 속에 짜증이나 원망은 들어있지 않으므로 큭~ 웃어넘깁니다.

              철딱서니 없는 마누라가 일은 벌여놨지

              수습은 못하고 있지 그냥 두고 보자니 불안불안 하지

              그렇다고 해본 일도 관심있는 일도 아닌 걸 어거지로 하자니

              제 허리병 만큼이나 죽을 맛일 겁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왕 미안한 김에 요기도 좀, 조기도 좀 지시해가며

              거슬리던 구석들을 대충 정리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만만한 놉님덕 제대로 봤습니다.

 

              가끔 그럴 때 있죠 왜.

              남자가 저만의 동굴에 처박혀 속터지는 곰이 되었거나

              두 살배기 아기보다 더 지능이 떨어져 보이거나

              곁눈질을 하거나 엄살대마왕이 되었을 때

              차라리 이어도를 찾아 떠나거나 아마조네스처럼 사는 게 낫겠다 싶은.

              하지만 저는 그런 생각 접은지 오래됩니다.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전등을 갈거나 못질을 하는 남자가 없는 세상은

              이제 상상할 수 없죠.

              참 낫질 포함입니다.

              가족 먹여살리겠다고 해뜨면 강시처럼 벌떡 일어나

              전쟁터같고 정글같은 세상속으로 돌진하는 전사보다

              밭고랑에 쪼그려앉아 풀 뽑는 남자가 훨씬 더 멋져 보이긴 처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