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자잘한 행운
일주일 단위로 일정표를 만들어 수첩에 적어두는 습관은 오래되었다.
습관이 타성에 젖으니 긴장감 따위는 있을 턱이 없다.
기록은 하되 확인하지 않는 또 다른 습관이 생기면서
오늘 처럼 같은 시간 약속이 겹치는 사태가 종종 발생하는 거다.
전곡 중앙도서관과 연천카페.
약속을 어겼을 경우 더 마음이 쓰일 곳으로 방향을 정한다.
서둘러 나서고 처음 약속한 자리에서 양해를 구한 다음
조금 빨리 나온다면 두탕 뛰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내 안의 긍정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집을 나섰다.
여차하면 뛸 생각으로 가장 편한 신발을 골라 신었다.
그리고 버스정류장 가는 지름길에서 복병같은 욘석을 만났다.
뒷통수를 보고는 죽은 다롱이인줄 알았다.
다롱아 하고 부르니 고개를 돌려 천연덕스럽게 눈을 맞춘다.
그랬었지.
이 골목에 살았던 비슷비슷한 강아지들 이름이 한결같이 다롱이었지.
그동안 어디 있다가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부루퉁한 표정을 보니 알겠다.
새침한 다롱이의 짝이었고 고만고만한 새끼다롱이들의 아빠였던 다롱이다.
그간의 사정을 물어본들 답할 처지도 그럴 기분도 아닌 듯 보이고
나 역시 갈길이 바빠 이름 서너 번 더 불러주는 것으로 반가움을 전하고는 돌아섰다.
돌아서자 조금 떨어진 큰길에 내가 타야할 39-2번 버스가 지나가는 게 보인다.
뛴다 해도 늦다.
긍정 수치가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다.
저걸 놓치고 나면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 대략 20분쯤 기다려야 한다.
아이고, 모르겠다.
두탕은 커녕 한탕 약속도 시간 맞추기 힘들 판이다.
길거리에 맹탕으로 서 있느니 바람막이라도 있는 다음 정거장,
터미널로 터덕터덕 걸어갔다.
터미널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나타난 기적같은 광경.
시간상 벌써 시내를 벗어났어야할 그 버스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동지섣달 허허벌판에서 꽃을 만난들 이 보다 더 반가울까.
한걸음에 달려가 버스 앞문에 섰는데 어라~ 문이 잠겨있다.
당겨보고 두둘겨도 보다 무언가 이상해 까치발로 버스 안을 살피려는데
안에서 유리창문 하나가 쓱 열린다.
운전기사 양반 뭘 좀 사러간 모양이요.
올 때 됐으니 조금만 기다려요.
어르신 한 분이 무덤덤하게 말씀하신다.
아하!
터미널에서 어쩌다 가끔 있는 일이다.
운전기사님이 하차해 자판기 커피를 뽑아드시거나
담배 한 대 태우시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운전 중 아주 잠깐이지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가 이곳 터미널이지 싶다.
해도 오늘같은 경우는 흔한 게 아니다.
근래 없었던 행운이다.
지금 이 순간이라면 느닷없이 뺨을 맞는다 해도 웃을 수 있으리.
다른 쪽 뺨까지는 못 내밀어주겠지만.
조금이 아니라 조금에 조금 더라도 기꺼이 기다리려 했으나
기사님은 내 다급함을 눈치채셨는지 금새 오셨다.
그렇게, 묵묵히 기다리던 승객들과 겁나게 운좋은 나를 태운 버스는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