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샀다.
딸아이가 중학교 2학년 무렵 어느 날 느닷없는 제안을 했다.
집안에서 텔레비전를 추방하자고.
드라마라면 재방송까지 챙겨보던 상황에서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저 멍텅구리를 끼고 앉아 일희일비하는 내 모습이 서글프기도 했던 참이었고
거절 한다면 엄마로서 체면 깍이는 문제기도 해서
마음 변하기 전에 후딱 시커먼 바보상사를 내다버린 이후
지금까지 8년 세월을 텔레비전 없이 살아왔다.
티비 없는 허전한 마음을 달래라고 설날 받은 세뱃돈으로 딸아이가 사준 '토지" 전집에
시선을 돌린 건 서너 달이나 지난 뒤의 일이었을 거다.
(21권 양장본으로 새단장해 나온 것인데 그 무렵 내가 무척 갖고 싶어 했었음에도)
그 전까지는 울냥반과 딸아이가 출근과 등교를 하기 무섭게
쏜살같이 옆집으로 달려가
늘 극적인 순간 끝나 버리는 드라마 그 후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마치 내 집 t.v인양 느긋하게 오전 프로를 즐기고 오곤 했다.
어찌어찌 우리집에서 존재감을 잃어가던 텔레비전이 애타게 보고 싶었던 때라면
2006년 독일에서 열린 월드컵, 온 세계가 들썩이던 그 때가 아니었나 싶다.
한밤중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환호성에 아~우리 선수가 한 골 넣었구나 짐작하는 것으로
붉은 열기를 식히려니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티비를 없앤 본인이 고등학교 3년을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동안
절간같은 집안이 서글퍼 확~ 저질러 버릴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어느덧 익숙해져 있는
햇살드는 아침의 고요와 잊고 있었던 책읽기의 즐거움과
울냥반과 떠드는 시답잖은 수다의 재미에
그 유혹은 가볍게 뿌리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해 12월 드디어 8년만에 텔레비전을 다시 장만하게 되었다.
오랜 객지생활을 청산하고 집에 돌아온 딸아이를 환영하는 차원에서.
우와!고화질로 보는 놀라운 세상!
텔레비전 타도를 외쳤던 딸아이는 이제 8년 전 헤어졌던 혈육을 되찾은 듯
한시도 리모콘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리모콘을 이모콘이라 부르며(성이 이씨다)
귀여운 제 아우인양 품고 있다는 어느 분 얘기가 남의 일이 아니다.
하긴 지난 연말 방송3사에서 펼쳐진 화려함의 극치였던 각종 시상식과
가요제를 보면서 나도 넋을 놓았으니 말해 무엇하랴.
어릴 적 동네 하나 밖에 없던 티비를
주인 눈치 봐 가며 보던 그때 만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슬슬 걱정이 된다.
벌써 중독 초기 증세가 시작 됐다.
들이긴 했으나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해
시어머니의 유품인 재봉틀 위에 올라앉은 텔레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