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일기

텃밭일기 2

타박네 2017. 4. 21. 22:54

 

             

       호미를 잃어버린 뒤 호미처럼 생긴 괭이를 사용하고 있어요.

               쪼그려 앉는 자세보다 허리에 무리가 덜 가는 듯 해 며칠을 들고 미친듯 휘둘러댔지요.

               씨앗들과 꽃나무들이 자리를 잡고 밭고랑이 정돈되어 가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신나는 놀이가 또 있까 싶다가도

               저녁이면 흠씬 두둘겨맞은 것처럼 에고데고 소리가 절로 나니

               이게 노동이 아니면 뭐겠냐 싶기도 하죠.

               놀이와 노동의 경계를 넘나들며 웃고 우는 요즘입니다.

               연예인들이 받는다는 협찬, 저도 누리고 있습니다.

                밤사이 담장 안에 던져두고 간 라일락 세 그루와 흰장미 두그루,

                삽으로 푹푹 퍼서 상자에 담아주신 은방울꽃이며 금낭화,(정원에서 자라는 꽃입니다)

                그리고 대추나무, 홍매, 오가피,산국,붓꽃,머위 등등...

                정으로 알고 받습니다.

                고맙습니다.

              딸기꽃 피기 시작했습니다.

                부탁해 얻어놓은 볏짚 찾아와야겠어요.

             세상의 나무와 풀꽃에 관한 모든 것을 (재배방법 포함) 꿰뚫고 있는 언니님이

               텃밭에 왕림하시면 내심 살짝 긴장됩니다.

               나무 심은 간격이 너무 밭다는 우려의 말은 당연 예상했구요.

               참나물 명찰이 꽂힌 고랑에서 그래, 아직 파드득나물과 참나물을 구별 못 한단 말야?했을 때는

               어라? 이 비슷한 말을 들어본 것 같은데... 하며 기억을 더듬었죠.

               그러고 보니 지난 해 봄,

               야생화공부 한다는 사람이 곤드레나물과 더덕을 구별 못 한다는 게 말이 돼? 했던 것 같네요.

               같은 돌부리에 두 번씩이나 걸려 고꾸라진 것 같이 참 무안했습니다.

               습하고 그늘진 데 심어야 할 꽃을 밭고랑 한가운데서 발견하고는

               혀차는 소리를 했을 때는 잽싸게 파내 자리를 옮겼어요.

 

               숙제검사를 받는 아이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덩달아 실소하기도 여러 번.

               지난 해보다 나아진 거라곤 괭이질 밖에 없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드는 순간,

               완벽한 언니님이 제 앞에서 빈틈을 보이시더군요.

               한 마디로 원숭이가 나무에서 똑 떨어진 거죠.

               여기 이거!

               맥문동은 왜 심은 거야?

               저 맥문동 심은 적 없는데요?

               이런 걸 밭에 심으면 어떡해, 확 번질 텐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풀하고는 달라 보여 뽑지 않고 있었는데 맥문동이라구요?

               어디서 씨가 날아왔나 보죠.

               씨가 날아오긴 어디서 날아와, 갖다 심었겠지.

               참내, 아니라니까요.

               어쨌든, 파버려.

               때마침 제 손엔 자루가 긴 호미가 들려 있었죠.

               퍽 퍽~~

               가뜩이나 볼품없는 풀떼기는 그대로 허연 알뿌리를 드러내며 나뒹구는 신세가 되고 말았어요.

               어?

               가만,이거 맥문동이 아니라 꽃무릇이잖아!

               세상에!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가요?

               손모가지가 일 저지르고 나서야 기억 한 조각이 떠오릅니다.

               지난 해 멧돼지가 파헤쳐놓은 자리에서

               비들비들 마른 알뿌리 서너 개를 주어와 딱 이 자리에 묻어 뒀었죠.

               떨리는 가슴으로 부랴부랴 다시 심었습니다.

               이번에는 확실한 이름표를 꽂는 동시에 돌멩이로 특별 보호구역임을 강조했습니다.

               너덜너덜해진 잎들에게 미안해서 가을에 꽃으로 만나자는 말은 못하겠어요.

               아이고,맥문동과 꽃무릇 구별은 못하시나 봅니다, 

               소심한 쨉 한방 먹이려는 순간 언니님이 먼저 선방 날리십니다.

               그래도 내 덕에 꽃이름은 알았지?

              텃밭 옆 골목, 담장 주변은 늘 쓰레기로 지저분합니다.

               근처 사시는 할아버지 한 분은 음식물이 가득 담긴 냄비를 들고 와

              제가 보는 앞에서 유유히 담장에 붓고 갑니다.

               오죽하면 동네 개**들도 배변활동은 꼭 여기서 하죠.

               고심끝에 꽃을 심기로 했습니다.

               혹시 깨진 유리창 이론이라고 들어보셨나요?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하면 그 지점으로부터 서서히 범죄가 확산되어 간다는 뜻을 담고 있죠.

               네,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쓰레기 한두 개가 무더기로 변하는 건 순식간의 일입니다.

               감당할 수 있을 때 뭐라도 해보고 싶었어요.

               예의 그 괭이질로 돌을 골라내고 그 자리에 꽃잔디도 심고 백일홍과 채송화 씨를 뿌렸습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잖아요.

               활짝 웃는 꽃들에게 물은 못 줄 망정 설마 쓰레기를 던지기야 하겠어요?

               이제 남은 문제는 말도 안 통하고 눈치도 없는 개** 뿐입니다.

            

 

              텃밭 근처에 있는 카페 온실입니다.

                일 마치고 잠시 들렀다 가는 곳이죠.

                푸짐한 다발을 선물 받고 싶은 유일한 꽃이지만

                이제껏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라넌큘러스가

                테이블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날 제가 주문하고 제가 받아보려구요.

                그것도 참 행복할 것 같습니다.

                꽃이 어지간히 예뻐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