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일기

텃밭일기 9

타박네 2017. 7. 3. 10:29

 

              아주까리라고도 부르는 피마자입니다.

               카페 온실 사장님에게 씨앗을 얻어 심었어요.

               저 어릴 적 공터나 집 울타리 근처에 한두 개씩은 있었죠.

               어린 잎은 삶아 말려두었다 보름나물로 먹었고 씨앗으로는 기름을 짰습니다.

               반질반질하면서 얼룩무늬가 있는 씨앗은 마치 작은 새의 알 같습니다.

               기름을 먹어본 기억은 없습니다.

               변비에 직빵이라는 말만 들었죠.

               독성이 강해 사망에 이를 수 있다니 약용으로 사용할 때 특히 조심해야겠어요.

               저는 열매에서 짜낸 기름보다 잎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뭘 좀 심으면 이 피마자처럼!

               배신 없이 씨앗 묻은 숫자만큼 싹이 나고 자라는 속도 또한 시원시원합니다.

               피마자를 심은 이유는 오직 하나.

               묵나물에 대한 향수 때문입니다.

               이때 꼭 나오는 게 신파조의 옛날타령이죠.

               유명 맛집이라는 식당 홍보 멘트에 빠지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 어머니가 해주시던...

               그게 무엇이 되었던 옛날 어머니의 손과 결합되면 게임은 끝입니다.

               어쩌면 그리도 찬란한 걸까요.

               호롱불이나 삼십촉 전구알 하나 밝히고 동그랗게 모여앉아 먹던 밥상의 기억.

               하도 어릴 적이어서 엄마의 피마자나물 맛을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선뜻 손 가지 않았을 거무튀튀한 색깔만 떠오르는군요.

 

               날이 갈수록 기억이 퇴화되는 걸 느낍니다.

               구차하던 시절 속에 점점 보석처럼 박힌 빛나는 기억들을 추적해갑니다.

               거꾸로 거꾸로.

               그 중 맛에 대한 집착은 집요하죠.

               먹고 자란 음식의 대부분이 그저 텃밭이나 들이나 산에서 나온 것들이니 망정이지

               무슨 귀한 재료에 요리실력이나 발휘해야 하는 것이었으면 어쩔 뻔 했나 싶습니다.

               요즘 저는 아, 이거였어 하는 맛 하나를 얻는데 영혼이라도 팔 기셉니다.

               팔자가 늘어져 구자가 되고 복에 겨워 요강 깨는 소리나 하고 자빠진 건지

               아니면 옛 기억을 더듬어 찾아낸 온기 한 조각으로

               지금을 견딜 만큼 사는 게 폭폭한 건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잘라내면 옆구리에서 새순이 돋고 또 잘라먹으면 다른 옆구리에서 돋기를 반복하던 쑥갓.

               더 이상은 미안해 그대로 두었더니 노란 꽃밭이 됐습니다.             

               제가 없을 때 밭주인 행세를 하는 녀석입니다.

                갈 때마다 늘 있어요.

                녀석이 제 기척에 놀라 냅따 뛰는 통에 저 역시 여러 번 놀랐죠.

                이제는 서로 안면 튼 사이라고 저나 나나 바라보는 눈길이 느긋합니다.

                딸기를 훔쳐 먹던 녀석입니다.

                저처럼 채식이 취향일까요?^^

                참고로 고양이가 앉은 자리는 밭고랑인데요.

                검정그늘막을 깔았음에도 이 지경입니다.

                그믈막 작은 구멍 사이를 기어이 비집고 나와

                바로 옆 양귀비와 쪽들보다 더 탐스럽게 자랍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죠.

                엊그제 철물점에서 작은 낫을 하나 샀습니다.

                보통 크기의 절반 사이즈인데 주로 텃밭 잡초제거용으로 사용한답니다.

                어제 오전 부슬비를 맞으며 한 고랑 베어 봤습니다.

                하다하다 이제 낫질까지 합니다.

               몰래 먹는 건 용서하마.

                나 없을 때 밭이나 잘 지키고 있어.

                돌담 사이 채송화.

                 이것도 옛날 재연놀이죠.

                 꽃을 참 좋아하셨던 엄마는

                 마당과 작은 밭고랑을 구분짓는 곰보돌 사이에 채송화 심는 걸 잊지 않으셨죠.

                 씨앗이 떨어져 대분은 절로 자라지만

                 어느 댁에 빛깔 고운 겹채송화가 있다는 말을 듣으면

                 모종을 얻거나 씨앗을 받아와 심기도 했습니다.

                 더러는 따라가기도 했죠.

                 엄마 손 잡고 이웃집 꽃밭 구경하는 건 신나는 일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꽃구경이라면 자다가도 벌떡하는 증세가 그때부터 있었군요.

             나면 나고 말면 말고!

               카도쉬 사장이 준 단호박 씨앗에서 어찌 용케도 하나 나왔습니다.

               길다란 호박과 달리 꽃 모양새가 순하고 아담합니다.

               참, 신기합니다.

               궁극에는 이런 재미죠.

                모종 옆에 구덩이를 파고 물을 들이붓는 정성을 다하자

                그 가뭄에도 실한 오이로 보답을 합니다.

                그리고 방울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붉고 노란 빛깔로 아침 밥상이 화려해졌습니다.

                조금 늦게 씨앗을 뿌려 이제 맞춤하게 자란 근대를 수확했죠.

                그 중 넓은 잎은 따로 골라내고 된장국을 한솥 끓였습니다.

                부드럽고 매끄럽고 달큰해 씹기도 전에 식도를 넘어가버리죠.

                밥 한 술 말으면 입맛 없는 끼니 때우기에 아주 그만입니다.

                따로 골라둔 근대잎과 케일 속잎은 끓는 물에 살짝 데쳤습니다.

                생쌈에 비해 숙쌈은 위에 부담이 적습니다.

                개인적으로 숙쌈 양념장은 된장보다 간장이 좋더군요.

                진간장과 집간장을 섞어 너무 달지 않게 합니다.

                파 마늘 고춧가루 깨소금 듬뿍, 거기에 들기름과 참기름도 적당히 섞어 넣죠.

                매운 거 싫어하는 남편 때문에 청양고추는 뺐습니다.

                아주 조금만 다져 넣으면 훨씬 감칠맛이 돌죠.

                으음,이 맛이야!

                옛 기억에서 뭐 하나를 건져올린 듯 행복한 저녁식사였습니다.

                그리고 비 내리는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