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일기 18
느닷없이 불어닥친 찬바람에 텃밭 채소와 꽃들의 몰골이 초췌해졌습니다.
때가 돼긴 했죠.
한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넘어설 때마다 늘 처음처럼 놀랍고 황망합니다.
비록 풀들과 뒤죽박죽이지만 텃밭 한켠 백일홍이 없었으면 어쩔 뻔 했나 싶습니다.
곤드레나물과 쪽은 이제 텃밭의 웬수 2종 세트가 됐습니다.
무서운 속도로 자라 풀들을 무찌르는 것까지는 좋은데 번식력 또한 무서울 정도여서
그대로 놔두면 텃밭 전체를 집어삼킬 것 같습니다.
내년 농사 계획 중 제일 앞선 과제는 구역을 벗어난 이 녀석들 퇴치작전입니다.
말라비틀어진 줄기와 잎으로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아 애처롭습니다만 갈 때마다 두어 개씩 내어주니 고맙죠.
보답하는 뜻에서 말통으로 물 길어와 넉넉히 줍니다.
그 정성을 생각해 늙은 오이는 다시 안간힘을 쓰고 저는 다시 말통으로 물 길어다 붓고...
서로 못할 이짓도 곧 끝나겠지요.
꽃대가 올라왔지만 아직 잎은 보드랍습니다.
밤새 얼지만 않는다면 한동안 더 싸브름한 맛을 즐길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케일 맛에 중독된 건 저뿐만이 아닌가 봅니다.
뒤늦게 벌레들이 달려들어 얼마 남지 않은 제 몫을 넘보네요.
상추와 달리 케일의 어린잎과 근대잎은 숙쌈으로 아주 좋습니다.
올 여름 내내 참 엄청 먹어치웠죠.
그바람에 상추가 밀려났어요.
끓는 물에 숨만 죽을 정도로 살짝 데친 케일과 근대,
매콤 고소한 양념간장만 있으면 열 반찬 안 부럽습니다.
채소 흔한 텃밭에서 귀한 호박입니다.
잎은 무성했으나 정작 열매는 부실했죠.
지난 해와 같은 자리에 심었으면 거름이라도 신경썼어야 했는데 많이 무심했어요.
그러구러 이게 마지막 호박이지 싶습니다.
모레 딸아이 오면 동글동글 썰어 전 부쳐줘야겠어요.
무얼 해도 좋을 보약같은 가을볕은 방울토마토의 단맛도 올려놓았죠.
톡톡 따는 재미에 먹는 즐거움까지,텃밭 효자 종목입니다.
최소한 양심도 없는 벌레같으니라구.
뭘 어째야 하나 전문가에게 조언을 들어봐야겠습니다.
브로콜리 몇 개 못 먹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당근 수확하면 서너 뿌리 주겠노라 약속한 친구가 있는데 걱정입니다.
뭉게뭉게 흰 꽃은 피었는데 나 먹자고 쑥 뽑아내자니 무슨 죄 짓는 것도 같고 참...
이불 한 채는 커녕 방석 하나도 못 만들 목화솜 따 무엇에 쓸까요?
호기심에 한 번은 심었지만 두 번은 못하겠습니다.
시기를 놓쳐 배추를 못 심었죠.
그 자리에 열무씨를 뿌렸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봄날과는 확실히 다르네요.
속터지지만 어쩌겠어요.
일을 두서없이 하다보니 호미나 낫을 찾아다니는 일이 잦습니다.
작년에는 호미를 며칠 전엔 낫을 잃어버렸죠.
종종거리던 밭고랑에서 두 눈 멀쩡 뜨고 말입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방금 전까지 풀 베던 낫이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늦여름부터는 풀을 호미로 캐는 게 버거워 주로 낫을 이용합니다.
낫이 없으니 밭에서 제일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제초작업에 당장 차질이 생깁니다.
부랴부랴 사들고 왔죠.
해외토픽에 나온 반지 낀 당근처럼
어느 날 감자가 녹슨 호미를 달고 나오고 무가 낫을 물고 나오는 거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