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일기

텃밭,5월 끝자락에서 초여름까지

타박네 2018. 6. 14. 10:02

   오월 말경,언니님이 텃밭을 방문했다.

   물론 이번에도 빈손은 아니었다.

   광릉수목원이었던가? 운 좋게 한 번 알현했을 뿐일 백작약 어린 묘목과

   어디 가면 볼 수 있느냐 물으면 어디나 흔하다는 시큰둥한 대답만 돌아오는 앵초와

   노랑갈퀴나물 그리고 족두리풀,돌단풍 등이 담긴 박스와 비닐봉다리는

   혼자 들기에 버거울 정도였다.

   기쁜 만큼 부담감도 적지 않았다.

   텃밭인지 꽃밭인지 풀밭인지를 시작한 첫해부터

   언니님이 협찬해주신 꽃들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극소수 뿐.

   이날처럼 불쑥 찾아와 그건 어딨어?라든가 그래, 잘 키우고 있어? 라고 묻기라도 하면

   그 잘하던 구라뻥도 입이 얼어 서걱거리곤 했다.

   풀인 줄 알고 베버렸어요는 성의라도 있지,

   뭐요? 그런 꽃도 주셨어요?

   뱉은 말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참 미안해서 미치고 팔딱 뛸 상황이 여러 번 있었다.

   같은 잘못 반복하는 아이의 특징은 싹싹 빌기도 잘한다는 것.

   이번에는 정말 잘 키울게요.

   명당자리가 어디더라...아무튼 최고로 볕 잘드는 데다 심어두고 조석으로 살필게요 했더니

   볕 잘 든다고 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돌단풍은 흙 냄새만 맏아도 잘 사는 것이니 밭 가장자리 돌틈에 적당히 묻어 두란다.

   야생화는 물론 원예용 화초와 각종 채소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식물과 재배법에 대해 거의 모르는 게 없는 언니님의 조언은

   밭은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구덩이는 뿌리보다 넉넉히 파고,

   심고 난 뒤에 돌을 눌러두면 표시도 되고 수분 증발도 막으니 일석이조,

   낫질이든 호미질이든 뽑아낸 풀들은 따로 버리지 말고

   채소 주위에 빙 둘러 놓으면 적어도 그 자리에선 풀이 안 난다는 것,

   풀들은 가급적 씨앗을 맺기 전에 뽑아야지 저것들이 날리기 시작하면

   내년 텃밭은 더이상 감당 못 할 지경이 되고 만다는 것 등등...

   그럼 뭐해, 어차피 소 귀에 경 읽긴데.  

 

 

 

  따는 즉시 물러버려 도무지 어찌해볼 수가 없는 딸기지만 서너 번 실컷 먹을 정도로 수확했다.

  먹고 남은 딸기는 모아두었다가 잼을 만들었다.

  거위알만한 병에 나눠 담으니 여섯 병이 나왔다.

  떠오르는 얼굴들은 따 모은 딸기 숫자만큼 많은데 이걸 누구 코에 붙일꼬...고민하다가

  마음의 무게와 상관 없이 가장 먼저 만나는 순서대로 선물하기로 했다. 

  동화 속 요들처럼 사랑스러워서 차마 뽑지 못했다.

  꽃이 덜 피었거나 시든 뒤라면 가차없이 해치웠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느 날은 웬수가 따로 없는 잡초,또 어느 날은 어여쁜 야생화.

  일관성도 없고 변덕 죽 끓듯 하고.

  이게 나냐? 

  한낯 햇살이 제법 앙칼졌던 어제,

  연천 장날이었다.

  굵은 손가락만한 햇고구마 만 원어치와 참마 이만 원어치를 사들고 오는데

  어르신 두 분이 요구르트나 하나 마시고 가라 붙잡았다.

  평상 한 귀퉁이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앉자 아예 편히 올라오라신다.

  바닥에 깔린 담요 위에는 두 분이 노시던 화투짝들과

  동전 대신으로 보이는 흰 바둑알이 널브러져 있었다.

  멤버들 다 어디 가시고?

  안즉 다 안 내려왔다.함 해 볼래?

  그럴까요?

  사실 화투라면 결혼 초 시어머니와 몇 번 해 본 게 경력의 전부다.

  혹시 초짜가 타짜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홍단 청단 비약 풍약 있는 거 없는 거 다 넣읍시다.

  오늘 판 싹 쓸어버릴라니까.

  큰소리는 쳤는데 뭐가 몇점 짜린지 도통 모르겠는 거다.

  해서 계산은 노름판의 멘사인 젊은 어르신이 대신 해 주시는 걸로.

  도박에서 손 씻은 지 너무 오래라 그래요.ㅎ

  사실 만만해 보였다.

  눈알 살살 돌려가며 옆 어르신들 들고 계신 패 좀 훔쳐보면서

  그림 짝 맞추는 거 정도야 누워서 숨 쉬기지 뭐.

  그랬는데,

  백전백패.ㅠ

  회를 거듭할수록 은근 빡치는 게 이거 장난이 아니다.

  두 분 짜고 치는 거 아니죠?

  에헤! 이렇게 야박하고 치사한 분인 줄 예전에 미처 몰랐네.

  사람 알려거든 같이 술을 마셔보던가 화투를 쳐보라더만, 옛말 틀린 거 없네,

  내가 던지고,

  수십 년 경력이 어디 간 거 아니다,

  어르신이 받고.

  핑퐁핑퐁 화투짝 주고 받는 것 보다 오가는 말이 더 찰지고 재미졌다.

  결국 단 한 푼도,아니 바둑알 한 알도  따보지 못한 채 물러나고 말았다.

  바둑알만 왔다리 갔다리 하는 거 말고 다음에는 짬뽕 걸고 합시다.

  좋지 짬뽕.

  내 도전장은 가볍게 수락되었다.

 

  화투 치느라 굳은 허리를 이리저리 풀어 달래며 일어났다.

  내 차림새가 딱 농군인 걸 보신 어르신 한 분이 따라나서셨다.

  그새 작은 평상은 어르신들 놀이판으로 열기가 후끈하다.

  밭을 보고 절대 욕하시면 안 돼요.

  다짐을 받았다.

  텃밭문을 열고 머리조심을 외치며 안으로 모시자

  아이고! 감탄인지 한숨인지 탄식부터 하셨다.

  그러더니 다짜고자 밭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맨손으로 풀을 뽑으셨다.

  안 된다니까요.

  요즘 살인진드기도 많고 날도 뜨겁고요.

  비닐봉다리 하나 드리고 상추잎이나 좀 따 달라 부탁드렸다.

  보기도 아까운 앵두와 뜰보리수는 준비해간 종이컵에 한 알,내 입 속에 한 알 번갈아 넣었다.

  그래도 서너 알 열렸던 지난해에 비해 수확량이 대폭 늘어 컵에 가득 찼다.

  말 안 하면 밭에서 밤이라도 새우실 기세인 어르신을 강제로 모시고 나왔다.

  평생 농사를 업으로 하신 분이라 언니님만큼 하실 말씀도 많았다.

  해묵은 딸기는 파 버리고 새순을 똑 따서 심어줘야 한다는 것.

  고춧대에 엑스자로 끈 묶는 법.

  심은 모종 주위에 동그란 고랑을 내 물을 준 다음

  스며들기를 기다렸다가 흙은 살포시 덮어주라는 것.

  풀을 첩년 머리 쥐어뜯듯 뜯어 놓으면 하나마나 팔만 아프다는 것.

  명심하겠습니다.

 

  상추 봉다리를 들고 다시 평상에 돌아오자

  화투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어르신 한 분이 물었다.

  그래 밭은 어떻든가요?

  뭐이 어때, 보니 눈물 나드만.

  꼬라지가 가관이라는 말을 참 구슬프게도 하셨다.

  상추장사 마치고 돌아서는 뒷통수에 대고 가한 마지막 일격,

  다 파서 뒤엎어뿌라 마.

  허리 아프다고 절절매는 거 보담야 낫지 싶은데.

 ㅋㅋㅋ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