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Book소리

계획이라는 거

타박네 2020. 2. 27. 11:39

    지난 해 마지막 달부터 새해 첫달을 다 보내도록 줄곧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머리 속이 엉킨 실타래로 가득 찬 듯했다.
    뭐 하나 변변한 것 없이 이제 곧 육십이더니 기어이 육십.
    젊은 척 하기도 늙은 척 하기도 애매한 나이가 됐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질풍노도의 시기처럼 다시 한 번 그 어떤 경계에 선 것 같았다.
    장난처럼 해오던 사진 찍기와 바느질과 수다와 끄적거리던 놀이들이 

    변덕 죽 끓듯하던 때처럼 한순간 아이고 의미없네 부질없네 싶다가도

    놓아버린다 생각하면 그만 기운이 쭉 빠져버리곤 했다.
    먹잘 것 없이 주르륵 가짓수만 늘여 차린 밥상 앞에 앉아 맛 잃듯

    똥빠지게 바쁘기만 하지 결국은 그저그런 거.

    팔과 다리와 머리가 내 의지대로 움직여 줄 것같은

    나이 마지노선을 칠십으로 잡아놓고 생각해봤다.

    물론 온갖 천재지변과 각종 사고와 숱한 질병을 다 피했을 때 얘기다.

    세월 앞에 가장 먼저 무릎 꿇게 되는 것 먼저 하자.

    꽃소풍이야 동네 뒷동산만으로도 넘치게 충분하고

    벗들과의 수다는 임종 직전까지 가능해 보이므로 일단 열외,

    돋보기 안경에 의지해 근근 이어가는 바느질과 독서가 따져볼 것 없이 앞줄에 선다.
    그래서 안하던 짓을 해봤다.

    새해라고 계획이란 걸 세우고 목표를 세워봤다.

    올 한해, 책 백권 읽기.

    지난 해 프랑스자수 입체꽃도 사실 백개가 목표였다.

    왜 백이냐고 누가 물었을 때 당시는 그 백이란 숫자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으므로

    그냥! 이라고 시큰둥하게 말했지만

    얼마 전 누군가에게서  설득력 있는 대답을 찾았다.

    인간이 되기 위해 웅녀가 쑥과 마늘을 먹으며 견딘 날이 괜히 백일이겠느냐며

    뭐든 습관화 되는 데 걸리는 최소 시일이 백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백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좋아,백권.

   

    해가 바뀌고도 달포 넘도록 머리맡의 책을 째려보다 잠들었을 뿐

    도무지 정을 붙이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 책이란 건 총,균,쇠 같은 대부분 정신적 허영심으로 사들인 것.

    더이상 몸에 맞지도 않고 갑옷처럼 무겁지만

    백화점에서 거액을 지불하고 구입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옷장 안에서 여전히 귀한 대접을 받으며 버티고 있는 고려짝 외투와 다를 게 없지 뭐냐.

    됐고,얇고 가벼운 것 먼저.

   

     계획하고 첫 책이 정원가의 열두 달이다.

     이건 정말 신의 한수였다.

     작업실에서 이 책을 집어든 건 순전히 장염 때문이었다.

     그날도 역시 독서보다는 바늘놀이가 만만했기에

     양파 염색한 무명천을 펼치고 초록실을 바늘에 꿰었다.

     하지만 창자가 뒤틀려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벌건 대낮에 드러눕는 건 내 스타일일도 아니고 죽을 것 같진 않았으므로

     눈만 뜨고 있으면 되는 책이나 읽기로 했다.

     아,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배 아파서 죽는 줄,

     화장실 들락날락 피곤해 죽는 줄,

     그럼에도 책장 넘길 때마다 웃겨 죽는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