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꽃밭일기
그럴 일 없을 거라던 그럴 일은 아주 쉽게 일어났다.
텃밭이자 꽃밭이고 풀밭이던, 해서 무엇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던 자리에
집 하나가 순식간에 우뚝 세워졌다.
마치 램프의 요정 지니의 소행인 것 같다.
그러려고 그랬는지 올봄 무스카리 꽃들은 유난히도 풍성했다.
작약은 눈부셨고 으름덩굴은 기운차게 담장 철망을 휘감고 올랐다.
노랑참나리며 수박풀 공단풀 씨앗 묻은 자리마다 어김없이 새싹이 돋아났다.
하다하다 아무렇게나 툭툭 썰어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심은 씨앗감자도
썩은 거 하나 없이 모두 싹을 틔웠다.
가만...꽃을 본 기억이 없다.
꽃이 핀 뒤 열매를 맺는 건 식물의 보편적 순서인데 감자는 예외인가?
아무튼 중장비가 밀고 들어오기 전 가까스로 세숫대야 하나 분량의 감자알을 수확했다.
충분히 여물지 못한 감자는 게으른 요리사에게 구박받기 딱 좋을 만큼 자잘했다.
그 중 실한 것만 골라 두어 군데 보내고 코끼리 코딱지만한 것들만 남았는데
확 파묻어버릴 걸 그랬나 후회하며 겨우 먹었다.
집이 들어앉을 자리에 있던 꽃무릇은 락선생님댁으로 보내고
흰무스카리며 앵초 백작약 꿩의비름 등은 화분에 옮겨 심었다.
좀 아슬아슬해 보였으나 일하시는 분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남겨뒀던
금낭화와 수선화 앵두나무는 하루 아침에 사라져버렸다.
부아가 치밀고 속이 쓰려
그날 밤 뜨거운 프라이팬에 누운 것처럼 뒤채다 겨우 잠들었다.
죽은 줄 알았던 하늘타리를 남쪽 벽 아래에서 발견했을 때는
하마터면 아이고,하느님 아부지를 부르짖을 뻔 했다.
가뜩이나 큰 집에 데크까지 이어붙였다.
영역이 더 쪼그라든 꽃밭에 다닥다닥 들러붙은 꽃들은
데리고 들어와 눈칫밥 먹이는 자식들 꼬라지가 됐다.
그 와중에도 열매는 익고 꽃은 피고 지고 했다.
지주님이었다가 이제 집주인이 된 언니는
꽃을 가꾸는 것 보다 감상하는 걸 더 좋아한다.
손바닥만하게 남은 꽃밭을 가리키며 나더러 제 집 정원 일을 계속 하란다.
살짝 드릅고 치사하지만 어쩌랴.
저것들이 인질인데...
속도 없이 한편으로 다행이다 싶으면서
그렇다면 내년 봄에는 뭘 어디다 어떻게 심어볼까
막 구상하면서 다시 조금 행복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