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Book소리

일흔 넷

타박네 2020. 12. 29. 21:18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소설

 

그때 우리에겐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와 아버지가 있었지.

머잖아 너는 아버지를 나는 엄마를 잃을 운명이었지만 어디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별이나 죽음같은 말이 아주 낯선,고작 열 살 혹은 열두 살 즈음이었으니까.

어제 먹은 점심 메뉴보다 수십 년 전 기억이 오히려 또렷할 때가 있어.

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뇌의 퇴화현상 때문이라고 말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오늘이 몇일인지 우리 나라 대통령이 누군지 아침에 뭘 먹었는지 보다

그 시절의 기억 한 토막이 훨씬 더 소중하기 때문이라고.

어쩌면 나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골라 기억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어린 자식들을 버려두고 어디론가 홀연 떠나버린 네 아버지와

마지막 감은 눈 사이로 흘러나온 눈물로 각인된 나의 엄마,

생이별이든 죽음으로 인한 이별이든 원망과 슬픔은 같은 것이어서

살아있는 한 결코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가 되었지.

우리가 맞닥뜨릴 그 참담한 순간을 일 년 혹은 삼사 년 앞둔 초여름 어느 날이었을 거야.

너희 집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집 텃밭에 딸기가 빨갛게 익어 있던 날.

끝내 유혹을 참지 못하고 담을 타넘었었지.

주전부리 귀하던 시절 그 빨간 맛은 정말 치명적 유혹이었어.

이날까지도 사려깊고 순한 네 성품으로 봐서 먼저 꼬드기지는 않았을 거야.

고작 딸기 두어 알을 따 먹고 도망치며 옷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심장을 

다독이느라 나는 안간힘을 써야했었어.

그리고 한참을 미친듯 웃어댔는데...

기억나니?

설마 나 혼자 벌인 일에 너를 끌어들여 가상의 공범으로 만들어 놓은 건 아니겠지?

기억이란 게 그렇더라.

시간을 관통하며 굴절되고 퇴색하면서 더러 왜곡되기도 하더라고.

더구나 나는 상상 혹은 공상에 일가견이 있었지.

만약 사실과 다르더라도 단독 범행이라는 부담을 감당하기 힘든 나를 위해

함께한 걸로, 콜?

 

너희 엄마가 끓여주신 고추장수제비를 먹고 철푸덕 방바닥에 엎드려 읽던 <공상과학 동화>.

당시 책 외판일을 하셨던 네 아버지가 남겨놓고 간 유일한 선물이었을까?

그 동화책을 처음 보던 순간의 느낌은  딸기를 훔쳐 먹었을 때와 흡사했어.

하늘을 나는 우주선과  수많은 별들 속에 띠를 두른 행성이 그려진 표지를 보았던 것 같아.

그림은 내 상상이 더해져 기억의 저장고에 보관되었는지 몰라도

터질 듯 가슴 뛰던 순간의 기억은 분명할거야. 

 

그 먼 기억을 소환한 게 바로 이 책이야.

내게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들과 더불어 존재했던 그 동화책이

너에게는 악몽일 수 있기에 이 책을 권하지는 못하겠다,친구야.

 

 

날이 추워지자 밥과 간식을 먹고는 조용히 사라진다.

따로 정해놓은 쉼터가 있는 듯.

방석 아래 묻어둔 핫팩의 온기에 의지해 잠시 낮잠에 빠진 라떼.

핫팩 후원자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