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Book소리

여든 넷

타박네 2021. 2. 24. 18:01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 / 샐리 티스테일

 

이 책을 마지막으로 숫자 세기를 마친다.

지난 해 2월 말,<정원가의 열두 달>을 시작으로 일 년 동안 책 백 권 읽기에 도전해봤다.

말이 도전이지 실상은 전투적 단어가 무색하리만치 즐거움으로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목표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서운하지 않다.

애초에 그 숫자라는 건 아무 의미 없었다.

결심은 깨기 쉽고 습관은 버리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딱히 할 게 없어 짬나면 그저 읽어대던 습관이

어느 때부터 집 밖의 다른 무엇들 유혹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 이렇게 특전사 됐노라' 사례발표장에 서도 될 만큼 몸은 튼실해졌으나

이대로 잊거나 잃어버리면 안 될 것 같은 '헛헛한 무엇'.

세상천지 마음 기댈 구석 하나 없어 떠돌던 시절에도 짐가방에 꼭 챙겨넣었던 게 책 서너 권이었다.

무슨 책이었는지 언제 미련없이 버렸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시절의 책이라는 건 절박해진 삶의 의미같은 상징이었을 뿐, 읽었던 기억 역시 없다.

사는 게 고단하면 책을 펼칠 기력도 없거니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짊어진 내 세상이 너무 무거워 다른 세상으로의 여행 따위는 엄두도 못내는 거다.

따뜻한 방과 가족이 주는 안정감 속에서 비로소 책은 즐거운 놀이가 됐다.

참 좋았던 시절이었다.

해마다 생일 선물로 남편에게 받았던 두 권의 책,(고민 말라고 내가 정해줬다).

딸이 세뱃돈 모아 사 준 토지 전집은 지금도 보물이다.

일 년, 무너져가던 습관을 바로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목적없고 기약없는 읽기는 글자를 식별할 수 있는 한 계속되겠지만

이제 유치한 숫자 세기는 멈추기로 하자.

 

 

얼마만에 가 본 서점인가.

폴 바셋에서 커피나 한 잔 마시자라는 말의 속내쯤은 어렵잖게 알아차리는 사이가 됐다.

함께 흘러온 세월이 고무신 한 짝으로 바꾼 손가락만한 엿토막은 아니었으니 뭐.

백화점 3층에서 커피를 마시고 곧장 영풍문고로 내려갔다.

올해는 고전 탐독을 좀 해볼 요량이다.

인터넷으로 구입하려다 실패한 책 몇 권이 있었다.

검색대에서 확인해보니 거기도 품절이다.

민음사 고전 시리즈나 훑어보고 가야지 하던 중  먼저 만난 것이 저 '걸 클래식 컬렉션'이다.

이미 읽어 익숙한 책이지만 도저히 무시하고 스쳐 지나기 힘들었다.

책장 앞에 쪼그려 앉아 맨 아랫칸에 있던 네 권을 몽땅 꺼내 가슴에 품으니 제법 묵지근했다.

며칠 전,금빛찬란한 복수초 앞에 이르렀을 때와 흡사한 전율, 감탄.

그리고 그때와 다른 하나, 격렬한 탐욕.

이걸 사겠다는 건 아냐 하지만... 너무 갖고 싶다...어쩜 이렇게  예쁜...읽지는 않겠지만 그냥...

그냥 장식용이지 뭐.하하~

아름다운 허영의 꿈속에 머문 시간은 짧았다.

그리고 나는 결정이 빠르고 분명한 사람이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고 정 갖고 싶으면 인터넷으로 구입하자 결정했다.

다만 제자리에 돌려놓기 전 조금 어루만지고 쓰다듬어본 것 뿐인데 그 모습을 미련으로 생각한 남편이

그렇게 좋으면 그냥 사라고, 제발 사라고,사주겠다고,한사코 권하는 바람에.

나는 아주 가끔 결정한 바를 개똥 취급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그래도 나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남이야 지장이 있거나 말거나 그건 남 사정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