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나이 들먹일 것 없이 할 수만 있다면 허송세월도 나름 근사한 삶의 방식이나
굳이 올해 목표로 민음사 '세계문학 50권' 읽기를 내걸었다.
해내기만 한다면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흐리멍텅,
상한 두부마냥 흐믈텅 녹아내리는 것만 같은 뇌세포에
그 양질의 단어와 문장들이 고단백 영양제 구실을 해줄 수도 있을 거라는... 막연한...어쩌면 말이다.
하면 뭐하나.
꽃에 한눈파는 사이 한해의 절반이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아직 반이나 남았어라고 긍정하기엔 50권의 무게가 살짝 버겁다.
다행인 것은
하기 좋은 말로 작업실이고 실상 놀이터에 다름 아닌 공간을 다시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마음의 여유 한 자락이 생겼으며
그 여유를 기꺼이 독서로 채우고 있다는 것.
도전에 앞서 우선 샛길로 잠시 빠진다.
종의 기원 / 정유정 장편소설
내가 아흔여덟 살쯤 먹어 죽음을 눈앞에 뒀을 때, 신이 나를 데리러 와서
네 인생 어디쯤에 한번 들렀다 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187p
야박하기도 해라, 딱 한번?
됐으니 그냥 갑시다.
대신 나를 스쳐간 무겁거나 가벼웠던,길거나 짧았던 숱한 인연들과
오욕칠정의 편린으로 꽉찬 내 기억의 저장고나 들고 가게 해주쇼,
그래야 야곰야곰 꺼내 보며 이승에서 못다한 은혜를 갚든 저주를 퍼붓든 할 거 아뇨.
환갑인 지금 당장 가는 게 아니라 아흔여덟이면...은근슬쩍 말 까도 될만하지 싶은데?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이다.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완벽한 거짓이다.
내 머리가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패이기도 하다. 206p
그런 패를 다수 보유한 일인.
누가 그랬던가."인간은 생의 1/3을 몽상하는 데 쓰고 ,
꿈을 꿀 때에는 깨어 있을 때 감춰두었던 전혀 다른 삶을 살며,
마음의 극장에서는 헛되고 폭력적이고 지저분한 온갖 소망이 실현된다고". 27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