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밥상

마음이 부른 밥 한끼

타박네 2010. 7. 18. 12:50

야생화 연구동아리 '들메오름'의 회장님이 지난 해 가꾸고 수확해 다듬어놓으신 박으로

분위기 근사한 스탠드를 만들어 볼 기회를 주셨다.

장대같은 빗줄기가 사정없이 쏟아지던 어제,

하늘j가 근무하는 사무실 한켠에서 회원들은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고

하늘j는 작은 보조 주방에서 또닥또닥 도마질 소리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음식 만들기에 바빴다.

곧이어 작업대로 배달되어 온 호박부침개,기똥차게 맛있다!

인간의 본능적 욕구 앞에서 이성과 체면은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가.

하루 안에 마치려면 갈 길이 바빠 마음 급한 회장님이

뭐라거나 말거나 삼 일 굶은 사람처럼 달려들어 뜯어 먹었다.

쏴아아... 요란한 빗소리와 부침개.

굳이 말 안해도 환상적이긴 하다.

무엇보다도 양념을 씻어내고 된장과 멸치 넣어 지진

묵은지찜과 별다른 재료 없이 간간하게 끓인 된장찌개.

고기 안 먹는 내 생각해서 하늘 j가 특별히 만들어 왔다는 그말에

맛을 보기도 전 눈물부터 날 뻔 했다.

먹이고 싶은 사람을 생각하며 만든 음식은 보약이나 마찬가지다.

 

난 사발농사(사발에 짓는 농사. 다시 말해 얻어먹는 행위)의 달인이다.

평소 지인들을 만나면 집안에 축하할 만한 경사가 있었는지 묻고는

(남편의 승진, 진급, 자식의 흡족한 성적표, 각종 시험의 합격...)

만약에 있다면 그 기쁨이 배가 될 방법으로 밥 한끼 쏘기를 권하곤 했다.

이 때 거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즐거이 응한다.

먹는 내내 아낌없는 축하와 덕담을 함으로써 밥 값을 대신하곤 하는데

이젠 아주 전통으로 자리잡아 길 가다 동전을 줍기만 해도 밥 사준다고 연락해 온다.

그대신 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밥을 먹인다.

얄팍한 내 지갑 사정을 생각한다면  한숨과 눈물 없는 세상이 속히 와야 한다.

경사는 줄어들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만 넘치는 폭폭한 세상!

시급한 당면 과제다.

 

'얻어 먹을 힘이 있을 때 얻어 먹자'

(얻어 먹을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입니다 하신 꽃동네 오웅진 신부님께는 정말 죄송하다)

'이웃의 경사는 나의 한 끼 식사' 이런 슬로건을 내세우며 너스레를 떨어오다

최근엔 더욱 자극적이고 과격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나 죽은 다음 아무 쓰잘머리 없는 부조금 들고 와 뒤늦은 후회 하지 말고

그 돈으로 '살아 생전 입맛 좋을 때 밥이나 한끼 사라' 한다.

어떤 친구는 이 말을 듣고 자빠질 듯 경악을 한다.

내가 목에 핏대를 세운 강단의 연사처럼 

밥 한끼를 빌미로 만남을  부르짖는 이유는 하나 밖에 없다.

나중에 나중에 하지말고 좀 보고 살자는 거다.

지금 당장.

마주 보며 복사꽃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을 때

잡은 손이 따뜻할 때 말이다.

 

얻어 먹자 하고 사 준다 해도 먹을 게 많지 않은 건 불행한 일이다.

나는 우리나라 통틀어 가장 천한 입맛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 가장 까다롭다는 소릴 듣고 있기 때문이다.

차 떼고 포 떼고 나면 남는 게 없는 것처럼

고기 못 먹고 생선 안 먹으니 외식이라 해 봤자 비빔밥과 칼국수 정도다.

좋은 꽃노래도 한두번이지 이젠 외식에 외자만 들어도 신물 넘어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저렴한 식성 덕에 사발농사가 쉬웠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 누가 밖에서 밥 먹자 하면 곤혹스럽다.

차라리 물 만 밥에 오이지 조각 얹어 먹는 게 백 번 나을 정도니까.

어제 하늘j가 차려준 소박한 점심 밥 한끼엔 눈물나게 고마웠던 이유가 많다.

 

검은 한지를 나뭇가지에 감고

바위에 붙이고 탈색시켜 자연스런 색상을 만드는 작업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들었다.

완성시켜 점등하는 순간, 뻐근하던 삭신의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