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묵밥
언 땅 가슴팍 헤집고 나온 여린 싹들이 한철 또는 서너 계절 뒤
닥쳐올 죽음의 시간을 알지 못한 채
한바탕 설레는 소풍놀이를 시작하는 잔인한 4월의 둘쨋주 휴일.
며칠 전 그동안 벼르던 제라늄화분 하나를 들이면서 그김에
지난 겨울 베란다 귀퉁이에 쳐박혀 모진 목숨 이어온 사랑초랑 아이비랑
이름모를 다육이에게 분갈이를 해 줬다.
붉은 꽃 하나를 더했다고 갑자기 빛나는 우리집 베란다.
바로 옆에 쪼그리고 앉아 함께 해바라기를 즐기는 사이 다가온 점심 시간.
평소와 다른 뭔가가 먹고 싶다.
휴일이니까.
산다람쥐보다 산을 더 잘 타는 산언니가 주워와
직접 만든 도토리가루를 꺼내 채에 한 번 걸렀다.
가루 작은 컵 하나 분량에 물 일곱 컵.
잘 저어 가라앉힌 다음 웃물을 따라버리고
다시 물을 섞으면 쓰고 아린 맛이 덜해진다고들 하는데
기다리는 미덕이 부족한 나는 먹고 싶을 때 바로 먹어야 한다.
소금 약간을 넣어 간을 맞추고.
밀가루풀 쑤듯 슬렁슬렁 저으며 끓이다가
주걱 젓기가 힘에 부칠만치 뻑뻑해지면,
반지르르 윤기 돌라고 들기름 한 티스픈 넣어주고
뚜껑을 덮어 은근한 불에 뜸을 충분히 들여준다.
묵 쑤기의 달인인 동네 어르신의 말에 의하면
이 뜸들이기가 묵맛을 결정지을 만치 아주 중요한 절차라고.
이제 스텐레스 용기에 고루 펴 담아 식혀주면 된다.
그저 손끝만 살짝 갖다 댔을 뿐인데
승깔 사나운 처자모양 부르르 진저리 치는 도토리묵.
부드럽고 매끄럽기는 장미꽃잎 목욕을 마친 양귀비 속살 같고
서시의 걸음걸이가 이 보다 더 간드러질까,
새봄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가 이 보다 더 낭창댈까.
호롱불 등지고 앉은 첫날밤 새색시 속눈썹처럼 파르르 떨리는 게
정녕 내 솜씨 맞나 싶다.
늘 준비되어 있는 (멸치. 다시마. 표교버섯) 육수.
속을 훑어낸 신김치를 송송 썰어 설탕과 고춧가루 조금 넣고
조물조물 무쳐 묵 옆에 넉넉히 담는다.
그리고 간장으로 간을 맞춘 육수를 붓고
김가루 뿌려주면 깔끔하고 담백한 묵밥 완성.
밥을 말으니 머슴밥처럼 그야말로 한사발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울냥반이 국물까지 싹싹 비운 빈 대접이
잘~ 먹었다고, 끝내주게 맛나다고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