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품
이건 장마가 아니고 지루한 우기다.
이러다간 인간에게도 허파를 대신할 아가미가 필요한 시대가 곧 올지도 모르겠다.
집안에 있어도 물속에 빠져있는 듯한 축축한 이 느낌, 불쾌하다.
가족들이 다 나간 틈을 타 보일러를 가동하고
장농이며 서랍을 활짝 열어젖혀 선풍기 바람을 쐬 주었다.
제습효과가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심심하던 차에 열어놓은 서랍을 뒤적이다 문득
두 해 전 이사할 무렵 남편과 했던 얘기가 떠올라 피식 웃고 말았다.
요즘 포장이사는 주인이 하나 손 댈 것 없도록 하는 섬세한 서비스가 생명이다.
이삿날 아침, 짐을 옮기러 오신 분들의 말을 듣고는
남편이 내게 박스 하나에 귀중품을 따로 챙기라 한다.
귀중품?
하니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없다.
5초쯤 생각하다 귀중품이라면 나 밖에 없으니
내가 들어가 앉겠노라 했더니 씁쓸하게 웃던 남편.
내게도 귀중품이자 사치품이 있긴 하다.
그 게 바로 책! 이라고 한다면 좀 있어 뵐까? ^^
바로 그거다.
내 정신적 허영심을 충족시켜줄 값비싼 몇 권의 책들.
물론 알차게 다 읽어
내 영혼의 안식과 삶의 지혜를 얻는 데 보탬이 됐다면 장식용 사치품이 아닌
필독서나 실용서라 말했을 거다.
눈에 딱 띄는 책장 중앙 명당자리에 떡허니 자리잡고 있던
사치품들을 보이는 대로 꺼내보니 우선은 다섯 권이다.
책의 크기도 여느 책들에 비해 우람한데다
양장본이라 하루 세 끼 먹고는 들고 앉았기도 버거운 것들이다.
제일 먼저, 프리드리히 니체의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이 신을 죽여 버린 것이다.
그대들과 내가......신은 죽었다.' 딱 이 말 한 마디에 꽂혀서 구입했다.
종교 본래의 의미가 퇴락해 가는 것에 대한 질타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르는 게 당연하다. 읽지 않았으므로)
내가 이 말을 화두처럼 붙잡았던 시기는 유독 내게만 가혹했던 ,
가혹해 보였던 운명에 대해 저주를 퍼붓던 십대 후반.
내게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 유령에 다름아니었으며
만약 신이 죽지 않았더라도 치사하기가,
유독 편애가 심했던 담탱이들와 다를 바 없다며
피해의식에 푹 쩔어 하늘만 보면 삿대질을 일 삼았던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어쨌든 난 신이 정말 죽었는 지 궁금했었지만
끝내 그 해답을 이책에서 찾아내지는 못했다.
아니,책을 펼쳐든 순간 별로 궁금하지 않아 바로 덮어버렸다.
성인들은 모두 말씀을 하신다.
예수도 가라사대~ 했고 공자, 맹자도 왈~ 했듯이
짜라투스트라도 세상에 말씀을 전하러 동굴을 박차고 내려온 걸로 안다.
내 소박한 바람은 말씀은 말씀으로 전해 듣고 싶다는 것.
손이 베일 듯 빠빳한 종이에 깨알같은 글씨로 전해지는 문자화된 말씀 말고
그 분들의 생생한 육성으로 듣고 싶다는 말이다.
이왕이면 자장가 부르면 딱 좋을 중저음에다 자랑스런 우리말이었음 더 좋겠고.
그 분들의 말씀은 분명 저잣거리의 무지렁이들도 알아들을 만큼 쉬웠을 텐데
그 말씀에 먹물이 묻는 순간 암호처럼 어려워 지는 건 뭔 지랄인지.
두 번째, 레프 똘스토이의 < 인생이란 무엇인가>.
1887년 <나날의 생각>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민중 사이에 널리 알려진 철학자,
성현들의 명언 잠언들을 담은 일력이라 한다.
일 년 365일의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어
하루에 고작 두세 쪽씩만 읽더라도
일 년이면 저 묵직한 지혜의 보고를 다 통달할 수 있다는 얘긴데...
처음 생각은 그랬었다.
하루를 정리하는 잠자리에서 성현들의 귀한 충고를 들으며 반성과 묵상을 하리라.
허나 내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난 체질적으로 영혼을 살찌워 줄 좋은 말씀, 다시말해 충고 듣는 걸 무척 싫어한다.
아들아, 딸아 인생을 이렇게 살라라~ 라든가
마음을 비우려면 이렇게 저렇게 하라 같은 인생의 지침서 말이다.
물론 이 책에 하찮은 잔소리 따위가 수록되어 있는 게 아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똘스토이의 마지막 대저서인 만큼
나같은 무지렁이가 감히 어떠하다 입에 올릴 수 없을 주옥같은 책이다.
다만 성실성 결핍증이 심한 난 이 책을 읽는 대신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똘스토이와의 교감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을 뿐이다.
세 번째, 토머스 아이스너의 <곤충>
프랑스의 곤충학자 파브르를 계승한다는 동물행동학과 생태학의 세계적인 권위자 .
반세기 넘는 시간을 곤충 연구에만 투자한 현장 생물학자, 토마스 아이스너.
들판을 쏘다니며 잡은 메뚜기나 잠자리 여치 따위가
장난감 대용이었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향수에 푹 젖어 있던 어느 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소개됐던 책이다.
때마침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읽고 곤충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되어 있던 참이었다.
그냥 청소년 대상 <파브르의 곤충기>나 빌려 봤어야 한다.
책을 열면 바로 졸음이 밀려오는 부작용이 장난 아니다.
요즘 수면제 대용으로 아주 조금씩 복용하고 있다.
그리고 탄생과 죽음의 궁극적인 의문에 대한 해답이 있을까 하고
구입한 파드마삼바바의 <티벳사자의 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바탕으로 교훈과 지혜를 전한다는 <지전> 까지.
다시 말하지만 책의 용도는 다양하다.
무기가 되기도 하고 베개가 되기도 하고 불쏘시개가 되기도 한다.
이 책들은 내게 있어 책 본연의 의미보다는
아까워 비오는 날 신고 나가지도 못하는 명품구두나
동창들 만나는 자리에 보란 듯이 둘러메고 나가는 명품백처럼 명백한 사치품이다.
누가 내게 물었다.
읽지도 않을 거면서 뭐하러 사 들이냐고.
비명횡사한 짐승털로 만든 수천만원을 호가한다는 털코트도,
말만 들어본 물방울 다이아몬드도 아닌
고작 책 몇 권으로 허세조차 부려보지 못한다면
내 쓸쓸한 갱년기 증세가 더 악화될 거라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