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범벅
외로움이 문제다.
배 곯는 것과 사무친 외로움.
그 처절함에 있어 한 치의 차이를 난 알지 못한다.
문득문득 그 깊이와 끝을 알 수 없는 망망한 바다에
겨자씨 한 알로 동동 떠있는 사무친 외로움에 몸서리 칠 때가 있다면
딸바보에 이어 마누라바보로 장안에 소문이 뜨르르한 남편이 서운해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잠시 위로 받을 수는 있어도 다시금 혼자 서야 하고 홀로 가야 하는 게 인생이다.
길은 만만치 않고 아득하다.
미안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닌 것처럼 외롭지 않다면 사람이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몸 어느 한 구석에 전자칩이 박혀있는 인간 사이보그일 가능성이 많다.
오늘 또 호박범벅 한 사발을 젯상모양 차려 놓고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 먼저 하는 덴 이유가 있다.
영혼의 허기까지 달래줄 음식 이야기다.
완벽하게 외롭지 않았던 시절을 가만 떠올려 보니
거기엔 비록 차림은 남루하나 꽃같이 웃는 엄마가 있었고
칠이 벗겨지고 귀퉁이 나무살이 드러난 밥상에 빼곡히 둘러앉아
이마를 맞대고 먹던 호박범벅이 보인다.
구멍난 문풍지 사이로 들어오는 초겨울 황소바람도 두렵지 않았던
내 생에 가장 따뜻했던 기억의 한 조각이다.
잘 익은 호박 껍질을 벗겨 생으로 믹서에 갈아 냉동보관을 해 두면 필요할 때마다 꺼내
손쉽게 죽을 쒀 먹을 수 있다.
우리나라 팔도에서 제일 잘나가는(실제로 집을 잘 나간다는 뜻) 백수인 내가
바지런을 떨며 그런 알뜰한 짓까지 할 시간은 없었는데
먹어도 먹어도 허기진 병을 눈치챈 지인이 마침 갈아 놓은 호박 두 통을 보내 줬다.
군남 옥계리 부녀회장님이 슬쩍 쥐어준 울타리콩도 있고
기억 나진 않지만 어느 마음 따뜻한 님의 땀이 배었을 팥도 한 봉지 냉동실 구석에서 찾아냈다.
울타리콩이야 바싹 마른 게 아니어서 금새 후루룩 끓이면 되지만
족히 석삼년 묵었을 팥은 미리 미지근한 물에 불려 두었다.
그리고 휘리릭 삶은 첫물을 버리고 넉넉히 물을 부어 말캉하게 삶았다.
찹쌀가루에 소금간 조금 하고 뜨거운 물로 대충 뭉쳐 놓았다.
쌀 귀하던 시절 엄마는 이 찹쌀가루 대신 밀가루를 넣었다.
사실 그 저렴한 맛이 더 그립긴 하다.
믹서에 갈은 호박을 먼저 푹 끓인다.
충분히 익은 호박에 삶아둔 울타리콩과 팥, 찹쌀 반죽을 왕창 쏟아붓고는
묽기를 봐가며 찹쌀가루를 추가한다.
이 때부터 자루가 긴 주걱으로 열나게 저어야 한다.
오죽하면 변덕 죽 끓듯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절감하는 순간.
여기저기서 정신 없이 폭발하며 날아오는 죽 파편 때문에 가스렌지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가뜩이나 나 닮은 밴댕이 소갈딱지만한 냄비에 시작을 했으니~
죽사발 타령하다가 하마터면 '사랑과 영혼'이 아니라 '사랑과 3도화상'이란 영화 찍을 뻔 했다.
마지막으로 소금간 하고 달달한 걸 좋아하므로 설탕도 넣었다.
어젯밤 과음하고 들어와 내심 북엇국을 기대했을 남편에게 차려준 아침 죽상이다.
보는 순간 표정도 죽상이다.
그래도 시원한 동치미와 죽 한 사발 다 비웠다.
먹는 내내 북엇국에 비해 결코 손색이 없는 호박범벅의 해독 작용과 영양성분에 대해
쉴 새 없이 잔소리를 늘어 놓았더만 숟가락질이 더 빨라지는 효과가 있었다.
손자병법에 마누라 앞에선 맞서는 것보다 달아나는 게 상책이라고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