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

동토의 하루

타박네 2012. 2. 3. 22:06

 

기록적인 한파로 얼어붙은 땅.

며칠 전 내린 눈이 그대로 쌓인 들판의 설경도 그다지 포근해 보이지 않는다.

늦가을부터 시작한 내 추위타령은 춘사월 노란 개나리꽃이나 펴야 멈출 것이고.

봄, 여름, 가을을 다 합친 세 계절과 겨울 한 계절의 길이가

내겐 자로 잰듯 똑같게 느껴진다.

산수유 꽃망울을 본 것같다 싶으면 어느새 부채질이고

조석으로 부는 바람이 선득하다 느끼는 순간

닥치는 기나긴 겨울.

 

내일이면 절기상으론 입춘이다.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봄! 이라고 불러본다.

조금 위로가 된다.

안밖의 기온차로 베란다 바깥쪽 창에 맺힌 물이 흐르다 그대로 얼었다.

                                              일명 얼음 유리창,  이글루에 사는 듯한 기분.

소심하고 까칠한 내 성질만큼이나 뒤끝작렬인 감기가

두고두고 기념하라며 남기고 간 기침을 달고 있는 데다

                                               요사이 한 번씩 박자를 놓치며 게으르게 뛰는 심장 놀랄까봐

                                               가급적 외출을 자제하고 있다.

                                               내 맘 대로, 내 멋 대로 꽃자수라도 있었으니 망정이지.

                                               참 지랄맞을 뻔 했다.  

영혼의 찌든 때를 말끔하게 씻어낼 수 있는 틱낫한의 말씀을 옮겨 쓴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

솔직히 이런 책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제아무리 좋은 말씀도 내 안의 마군이가 잔소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깥은 모든 생명들이 얼어죽은 무덤처럼 을씨년스럽기만 하고

                                               집 안이라 해서 별 다를 것 없는 요즘,

                                               평소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던 내 영적 상태가 새삼 걱정스럽던 참이었다.

아무렇게나 뒤적거려도 참으로 아름다운 말씀들로 가득한 책이다.

허나 여전히 집중하기는 어렵다.   

이 책을 먼저 읽은 울냥반이 군데군데 밑줄을 그어놨다.

그 중에서 눈에 띈 이 글귀.

' 사랑은 소유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

                                              이건 뭐 사춘기 첫사랑의 열병을 앓을 나이가 되면

                                              누구나 한 번쯤 노랫말 외우듯 읊어보는 말 아닌가.

 

저 글귀를 보니 것도 추억이라고 지옥같았던 학창시절의 일부분이 떠오른다.

나름 나를 다스려 보겠다고 수첩에 깨알처럼 꼭꼭 새겨 적었던 숱한 명언, 잠언들.

(가련하고 열등한 내 자신은

싸워 이기고 극복해야할 상대가 아니란 것을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알았다)

그 중에는 러시아의 문호 푸슈킨의 시도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흥~웃기고 자빠졌네.

이건 자빠진 놈 한 번 더 사뿐히 즈려 밟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꺼이꺼이 목놓아 울고불고 해야 마땅한 슬픔과

저주를 퍼부을 곳을 찾아내 길길이 뛰고 삿대질 해 가며

팔도에 떠도는 온갖 육두문자를 모아 모아서 

강력한 한방을 날려줘도 풀릴까말까한 분노를

그냥 참으라고?

참을 인자 세다가 기쁨의 날 오기도 전에

울화병으로 황천길 타박타박 걷게 생겼구만.

그러므로 삶이 내게 테클을 걸어오면

맘껏 슬퍼하고 치열하게 분노하자...라고 고쳐 적었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인간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했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난 슬픔을 모르는 인간,

화를 내야할 순간조차 우아한 위선의 가면을 뒤집어 쓰는 인간과는

절대로 말을 섞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었던  그 때.

앗! 또 샛길로 빠졌다.^^

 

 마치 다짐이라도 하듯 지성스레 그어놓은 파란 물결무늬 밑줄.

실제로 남편은 내게 그런 사랑을 주려 노력했고

그 덕분에 내 인생은 비명횡사한 털가죽옷이나 명품백 하나 없이도 풍요롭고 평안했다.

이제는 조금 빛바랜 사랑에도 불구하고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생존인물은 변함없이 남편이다.

북 치고 장구도 치고 타령도 하다 배 고픈 시간이 됐다.

들깨떡국을 끓였다.

늘 똑같은 요리법.

멸치육수에 떡국떡 한 줌 넣고 끓이다가 들깨가루 팍~

평소엔 계란을 휘이~ 풀어 먹지만 심심하니 별난 짓도 함 해 보고.^^

남해가 친정인 수영이가 '영원한 왕언니께'란 정다운 메모와 함께 건네 준 유자차.

직접 만들었다고 했던가?

칼질 좀 하는 나 정도 고수의 채썰기 솜씨인 것으로 봐서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이 청정 남해산 유자차를 다 먹을 때까지 저 메모지를 그대로 붙여 둘 예정이다.

봉다리커피 말고는 달달한 차를 즐기지 않았지만 '영원한 왕언니'를 보면서 마시다 보니

갑자기 유자차가 좋아졌다.

부디 일흔, 여든살이 되서도 어르신이나 노인네가 아닌

왕언니로 불러 주기 바란다.수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