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의 추억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뭐냐 묻는다면
나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라면! 이라고 말한다.
오십 평생 살아오면서 눈물을 질금거릴 만큼 감탄하거나
감사하며 먹었던 음식의 기억 대부분을 라면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
내 생의 최초 라면은 늘 감질났으나 따스한 맛이었다.
시골국수가 도시에 나가 꼬불이 빠마하고 나타난 것처럼
어딘지 모르게 촌스러우나 또 어딘지 모르게 '있어뷔던' 삼양라면이었던가?
식재료의 거의 대부분을 텃밭 아니면 들과 산에서 자체 해결하던 시절,
것도 돈 주고 사 먹는 음식이라고 그리 흔치도 넉넉치도 않았다.
식은 밥 한덩어리 남아있는 날 김치 숭숭 썰어 넣고 라면 뽀샤 넣고 부글부글 끓여
대여섯 식구 허기를 달래던 일명 꿀꿀이죽이거나
라면 두어 개에 국수를 추가로 넣어 끓인,
도대체 음식의 정체성이 모호한 라국시.
그 옛날 어머니의 커다란 양은냄비는 마치 동화 속 조약돌 수프처럼
아주 적은 재료로도 뜨끈하고 푸짐한 음식을 만들어내던 요술 냄비였다.
결혼 초, 남편과 수락산으로 나들이 하던 날.
수락산 정상을 마치 우리집 뒷동산 쯤으로 여기고
잠깐 올라갔다 내려와 밥 먹자 하며 물 한 병 달랑 들고 올랐으나
산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신진대사 왕성하던 젊은 창자는 먹을 걸 넣어 달라 아우성 치기 시작했다.
서둘러 하산을 했음에도 허기는 이미 극에 이르러 인간의 존엄성이고 나발이고
보는 눈 없고 하늘만 무섭지 않다면 달려들어
서방 허벅지 살이라도 뜯어 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천자문 서두에 나오는 천지현황,
하늘과 땅이 검고 누런 이유를 그 날 제대로 알아먹은 것이다.
어쩌면 내가 짝퉁채식주의자에서 육식열광주의자로 갈아탈
유일한 기회였을 수도 있겠다.
모르면 몰라도 동공까지 노래졌을 무렵 만난 포장마차에서
뜨거운 물을 붓고 3분을 미처 다 기다리지 못하고 덤벼들어
거의 3초만에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먹어치운 사발면.
하마터면 프라스틱 용기마저 아작아작 씹어먹을 뻔한 그 때의 라면 맛을
나는 두번 다시 느끼지 못했다.
영화 식객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라면을 맛있게 끓여 먹는 방법을 부디 알려달라
애걸복걸 꽁무니 졸졸 따라다니던 사람에게 성의없이 툭 던진 한 마디,
배 고플 때 먹어.
백번 맞는 말이다.
음식 앞에 두고 매운 타령 짠 타령하거들랑 쫄쫄 굶겼다가
그야말로 디지기 일보 직전 먹이면 팅팅 불어 우동으로 변신한 라면일지라도
죽어도 잊지 못할 별미로 영원히 남을 테니까.
사실 라면은 맛 없게 끓이기가 더 어려운 음식 중 하나다.
라면 만드는 전문가들이 실험에 실험을 거쳐 오죽 잘 만들었을까.
정해 준 용량 대로 물 붓고 파르르 끓이기만 하면
일단 기본은 먹고 들어가는 것임에도
뭔 씨잘떼기 없는 창의성을 거기다 발휘하는지 흐여멀건 국을 만들거나
라면볶음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 희안하게도 내 주위에 많다.
부추나 깻잎같은 향긋한 채소를 꾸미로 얹거나
계란 탁, 파 송송해 살짝 한 단계 신분 상승한 라면부터
각종 신선한 해산물을 곁들인 해물탕 탈을 쓴 귀족라면,
송이나 능이처럼 귀한 버섯들을 마치 발치에 채이는 흔한 식재료인양
한웅큼 툭 던져넣고 끓인 허세라면까지.
라면은 참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