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추김치
엄마 밥 먹자고 집에 온 딸아이에게 연거퍼 소금범벅을 먹인 게 얼마 전 일인 데다가
남편과의 오붓살벌했던 엊그제 저녁 식사시간 이후 밥상 트라우마가 장난이 아닌 지금,
가만 놔두어도 제풀에 기죽어 고꾸라질 꺽어진 반백의 고지를 힘겹게 넘고 있는 이 때.
잘한다, 잘한다 꽹가리 치고 나발 불어줘도
바닥에 널브러진 용기를 다시 추스려 세우기엔 역부족인 이 상황에서
이것도 요리랍시고 들고나와 포스팅을 하기 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더이상 구라청이 아닌 기상청의 일기예보 대로 장대비 퍼붓던 엊그제 일이다.
골난 바람이 골목에서 씩씩 거친 숨소리를 내며 벼르고 있어 장 보러 나갈 엄두조차 못 내고
애꿎은 냉장고 문만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저녁을 맞았다.
냉장고 안은 아무 생각 없는 내 머리통 만큼이나 텅 비어 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눈 감고 발꼬락으로 슥슥해도 남들 하는 기본맛 정도는 거뜬 해 낼 수 있노라 자부심 넘치는
내 주종목, 수제비 재료는 있다.
빗소리와 뜨끈한 수제비는 또 얼마나 환상적인 궁합인가.
멸치 육수를 끓이고 밀가루 반죽을 치대면서 감자수제비 한그릇이 줄 행복한 시간을 떠올리며
흥흥흥 콧노래까지 불렀지 아마.
문제는 사는 일이 늘 계획 대로 착착 진행되는 게 아니란 것에서 시작 된다.
피로와 시장기를 얼굴에 덕지덕지 바르고 평소 보다 한 시간 늦게 퇴근한 남편을 보자마자
잠재되어 있던 내 안의 조급증이 발딱 기지개를 켜고 말았다.
부르르 설 끓은 육수에 뭉텅뭉텅 떼어 넣어 짱돌같은 반죽 덩어리, 덜 익은 감자와 호박.
그래도 뭐...썩어도 준치라고.
비록 정성 좀 빠졌다 하나 분식계의 미다스 손을 거친 수제비 아니냐,
내심 우쭐하며 담아냈는데
첫술을 뜨던 남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다.
그러다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는지 태연하게 먹기 시작한다.
배 고픈 것 같아 급히 하느라... 맛이 좀 그렇지?
묻자마자 대답 대신 수제비 사발에 코를 박고 풋! 웃는다.
건더기는 먹지말고 국물에 밥 말아서 먹어.
이 말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미 사발 속 건더기는 개 밥그릇에 도토리알처럼 따돌림 당하고 있다.
아침은 황제처럼 저녁은 거지처럼 먹는 게 건강에 좋대.
딱 거지같고 얼마나 좋아.
무언가 말하고 싶은 걸 애써 참는 듯한 남편의 입근육이 잠시 경련을 한다..
아무래도 나 요리학원에라도 다녀얄까봐.
거의 애원하는 눈빛으로 남편이 말한다.
학원비로 그냥 외식하면 안 될까?
이 말은 내게 축복일까, 비수일까.
한참 생각했다.
먹을 줄 아는 음식이 별로 없는 만큼 할줄 아는 음식도 극히 드믈다.
그 몇 개 되지도 않는 할 줄 아는 음식 중에 수제비 굴욕 사건은 내게 큰 충격이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잔치국수, 비빔국수,수제비,이 분식 삼종 셋트는 내 요리 주종목이다.
이걸 포기한다는 것은 김연아의 피겨 연기에서 트리플럿츠를 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면 된다.
주방 전선에서 더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마지노선이 와르르 무너지고 만 것이다.
무슨 일 무슨 일 해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먹고 사는 일이다.
오십 고개를 넘어서며 갱년기 훈장처럼 얻어걸린 게 불면증이다.
어디 한 군데 뚝 부러지거나 피 철철 나는 외상과 달라서
대놓고 나 힘드요 말하기도 어렵다.
자칫 오뉴월 엿가락처럼 늘어진 상팔자가 복에 겨워 하는
니나노 타령이거니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참 억울한 게 많은 드런 병이다.
어쨌든 마땅히 내세울 것도 없는 마당에
어디 병 자랑질이나 해 보자 작정하고
만나는 지인들 소맷자락 부여잡고 떠든 보람이 있어서인지
최근들어 증세가 많이 호전 되었다.
이제는 가끔 대낮부터 꼬박꼬박 졸기도 한다.
평소 워낙 쓴맛 나는 채소를 즐기는 터라 잎이
억세지고 대궁 오른 상추는 약재라기 보다 내겐 귀한 식재료다.
언젠가 지나는 말로 약초대장님께 부탁했는데 잊지않고 챙겨주신다.
채소가 아니라 거의 나무같아 보이는 상추에 유난히 많은 흰 진액에는
불면증과 우울감을 완화 시키는
'좋은 성분'이 들었다 한다.
굵은 대궁은 십자 모양으로 가르고 적당한 길이로 잘라
소금에 살짝 절였다.
김치 시늉은 내야하니 풋내를 잡기 위해
밥 한덩이를 물과 함께 믹서기에 갈아 풀물을 대신하고
양파, 마늘, 파, 매실액,고추가루, 소금, 새우젓으로
맛을 내고 간을 했다.
아무래도 요리를 포기하기엔 이른 것 같다.
처삼촌 벌초하듯 설렁설렁 대충대충 했는 데도 여간 맛난 게 아니다.
길 가다 뉘 집 담벼락에 기대어 졸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면
상추김치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