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
하여튼 우리 나라 사람들 **하거나 안 하거나 둘 중 하나야.
개그콘서트 '두근두근'이라는 코너에서 예쁜 개그우먼이 하는 유행어다.
대체로 명암,흑백 만큼이나 선명하게 대립되는 이분법.
처한 상황이나 닥친 위기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지는 그것은
깊은 열등감임과 동시에 이루지 못할 꿈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나는 세상을 이렇게 둘로 나누었다.
검정 고무신과 빨간 구두.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세상은 어딘가 모르게 불공평하고
깨놓고 부조리하다는 걸 조금씩 눈치채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새벽별 보고 나가 등이 휘게 일하고 달빛에 지친 긴 그림자를 끌며 들어와도
세 끼 밥 먹는 일이 사치인 사람들과
머리에 포마드 번질하게 바르고 하릴없이 어슬렁 거려도
지갑 안에선 지폐들이 질식사하는 사람들.
그런 세상에 삼신할매의 손가락 방향따라 영문도 모르고 나와
빨간 구두를 신거나 검정 고무신을 신거나 둘 중 하나.
이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므로
검정 고무신을 신게 된 나로서는 어쩐지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억울하다.
학창 시절, 짝사랑만으로도 버거워 어차피 공부에 허비할 열정이 없었던 나는
바퀴벌레보다 더 독한 공부벌레들 정수리가
선생님들의 쓰담쓰담으로 닳아 문드러지든가 말든가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만약 상황이 달라져 모범생과 문제아로 양분된 세상을 체감했더라면 대립된 자리에 올라선 그들은
나의 온갖 원망과 저주를 받다가 끝내는 영문모를 두통이나 토사곽란에 시달려야 했을지 모른다.
그 점에서 동시대를 살아 나와 같은 학교를 다녔던 범생이 학우들은 내게 감사해야 한다.^^
실연으로 박격포탄 맞은 것처럼 가슴 속이 뻥 뚫렸을 때
이 세상엔 사랑을 쟁취한 승자들과 사랑을 빼앗긴 패자들로,
여자 팔자 뒤웅박이란 되도않은 속설 증명이라도 하듯
기똥찬 순간의 선택으로 남의털 코트를 장바닥 물건인양 사 입는 시집 잘 간 여자들과
이건 뭐 원 플러스 원도 아니고 시부모 봉양을 유일한 결혼 선물로 받은 결혼 참... 자알... 한 여자들로
그렇게 이분법의 기준은 시시때때로 바뀐다.
세상의 빛깔이 오로지 희거나 검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도 한동안 습관처럼 이분법을 놓지 못하고
은근히 패자와 아웃사이더 역할 놀이를 즐기며 중모리 장단으로 징징거리던 타령이 어느 날부터 시들해졌다.
불현듯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철이 들어서가 아니다.
내 안에서 치열함이 사라졌다.
어쩌면 편협하고 치졸한 이분법적 사고보다 더 나쁜 상황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