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사랑하는 쑨의 딸 결혼식에 참석해
먹지도 못하는 핏물 줄줄 흐르는 스테이크 접시를 앞에 두고는
내 배 곯는 건 둘째치고 괜히 참석해 비싼 식비만 쓰게했구나 미안했다.
결혼식 피로연을 마치고 광장시장 들러
사람들 북새통인 골목을 휩쓸려 다니다가 필요한 약 몇 가지 사 돌아오니
해 넘어간지 오래.
일요일엔 차탄천 한바퀴 휘이 돌고
부랴부랴 중학교 동창들로 구성된 합창단 공연을 보기 위해 수레울 아트홀로,
어제는 왕언니님들을 뵈러 의정부 백화점으로.
주말과 평일 구분 없이 고루 바쁜 게 백수 생활 특징이다.
한바탕 푸닥거리를 마친 뒤,피로가 겹겹이 쌓인 아침.
그래도 하던 짓은 한다.
새벽같이 일어나 작은 무쇠솥에 고구마 서너 개 굽고
우유와 꿀 조금 넣어 마 갈고 구운 달걀 두 개,과일 한 접시로
아침상 차린 뒤 남편을 깨운다.
실땅님이 정기적으로 공급해주는 달걀이 영 줄어들지 않아
어젯밤 압력솥에 몰아넣고 구워 놓으니 조금 편하다.
1부 아침이 끝나면 피오나 아침이 시작된다.
자소서라 쓰고 자소설이라 부르는 무언가를 집필하느라
밤잠 설치기 일쑤인 취준생 피오나의 하루는 보통 10시에 시작된다.
배운 도둑이라고 공부말고는 해 본 게 별라당 없는
그 말간 청춘에서 별스런 무언가를 쥐어짜내느라
벌써 노화가 빠르게 진행 중이라는 피오나.
하는 짓으로 봐서는 취업보다 신춘문예 등단이 빠르겠다.
할 수만 있다면 내 파란만장 인생경력을 좀 빌려주고 싶다만.
집 크기에 비해 과하게 큰 창의 가장 큰 부작용은
집구석 구석구석을 무작스런 햇살이 점령했을 때 드러난다.
으으,그 참을 수 없는 적나라함이라니.
며칠 무심했던 사이 합체를 마친 각종 섬유먼지들이
집주인 행세을 하며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한가롭다.
하던 끝에 인내심을 조금만 더 발휘하면
올 여름 파리끈끈이로 대신 사용해도 좋게 생긴 가스레인지와
슥삼년 묵은 듯한 빨래더미까지 달려들어 해치우고 나서
드.디.어
세상 모든 주부들의 판도라 상자,냉장고 문을 열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바람든 무 두 토막.
것도 엄청 큰.
강원도 시댁에서 뽑아 왔다며 친구가 준 것을
한 토막씩 잘라 먹고는 처박아 둔 것인 모양인데
그 차가운 냉장실서도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거의 자연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친 듯한 꼬라지다.
상한 부분 잘라내고 껍질 벗기니
바람 숭숭 들었어도 그런대로 먹을 만은 해 보인다.
'아주 까다롭게 고른 싱싱한 재료를 사다가
냉장고에 넣고 푹 숙성시킨 뒤 음식물 쓰레기통에 처박기 일보직전 꺼내
최상의 요리를 만들어 내는 달인'이 바로 나다.
이제 피오나를 위한 2부 아침 준비 시작.
두툼하게 썬 무,정성껏 염 마친 멸치,다시마,말린 표고버섯,
생강,대파를 두꺼운 냄비에 담고
맛간장 집간장 청주 다진마늘 고추가루 들기름 섞어 만든 양념장을 넣은 뒤
재료가 잠길 정도로 물을 붓고 뭉근하게 조려낸다.
무조림은 싱거운 것보다 조금 간간해야 더 맛있다.
바람든 무는 이렇게 오늘 아침 피오나의 밥상에서 빛나는 주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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