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허브빌리지 콘도에서 하루 묵었습니다.
느닷없는 휴가였죠.
자주 가는 곳이라 여행같은 설레임은 없었습니다.
어스름 저녁 군데군데 색색의 백합이 무리지어 핀 산책길을 걷고
카페 테라스에서 차를 마셨어요.
최근 일체 카페인 음료를 끊고 사는 형편이라 커피는 남편만 주문했습니다.
이 정도 쯤이야 뭐 어떠려고 하면서 서너 모금 홀짝인 커피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장난삼아 마신 소주잔 한 컵 분량의 포도주 때문이었을까요.
결국 밤새 뜨거운 프라이팬에 들들 볶이는 콩처럼 이리저리 뒤채야 했습니다.
깊은 밤, 이층 침실 천장 유리창에 토톡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잠시 뒤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세찬 빗소리가 방안 가득 찹니다.
낯선 공간에 아주 오랜 세월 들어온 익숙한 소리가 고이자
그제서야 안도감이 들더군요.
이유모를 불안과 어색함과 불편함들이 사라진 자리에
오래된 기억들이 스멀스멀 기어나옵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급하게 쏟아지던 소나기와
비를 머금어 더욱 짙어진 대나무 마루 냄새, 부엌 냄새, 비릿한 비 냄새, 외할머니 냄새.
열 살 남짓 무렵이었을까요,
이날 소나기 내리던 오후는 소리보다 냄새로 기억의 저장고에 담겼습니다.
그리고 양철지붕을 부술듯 퍼붓던 비.
애초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던 집이었죠.
수도와 전기시설이 없는 집이었으니 어차피 겨울 나기는 어려운 형편이었어요.
말이 집이지 양철로 대충 벽 가리고 지붕 올린 창고같았죠.
집 바로 앞을 흐르는 개울에서 세수를 하고 빨래를 했습니다.
당시 사람을 극도로 꺼리던 제 정서에 아주 잘 맞는 환경이었죠.
문제는 비오는 날이었어요.
수 천 수 만 아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죽창이 양철 지붕에 내리 꽃히던 밤 말이죠.
너무나 무서워 최대한 크게 볼륨을 올려놓은
아바의 음악조차 빗소리에 잡아먹힐 정도였습니다.
그 무서운 빗소리에 맞서 내세울 제 무기는
큰 건전지 네 개가 들어가는 작은 카세트라디오 뿐이었습니다.
고막이 터질듯한 빗소리와 아바의 노래가 뒤엉킨 방안은
마치 거인들의 격투가 벌어지는 현장 같았습니다.
지금도 빗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아바의 노래가 연상되곤 합니다.
부산의 어느 산골짜기, 제 나이 스무살 무렵 얘기네요.
어린 시절,느닷없이 비가 내리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바빠집니다.
마당에 널린 빨래도 걷어야지요,
낮은 지붕 위에 무어라도 썰어 말린 채반이 있나 까치발로 확인도 해야죠,
장독 뚜껑도 닫고 빗물 받을 고무대야도 처마 밑에 둬야 합니다.
그리고 제일 심심한 날은 비오는 날이었죠.
처마 밖으로 손을 내밀어 빗물을 받기도 하고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기도 하면서 지루한 시간을 견디고 있을라치면
분주하게 집 안팍을 살피던 엄마가 한 마디 합니다.
아서, 사마구 난다.
이 무진장 오래된 기억까지 퍼올리자 마음이 따뜻해져
까무룩 잠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아침에도 비는 내렸습니다.
산책을 하려던 계획은 무산됐지만
침실 창을 가득 채운 초록빛깔 만으로도 행복한 아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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