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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일기

텃밭일기 18

by 타박네 2016. 10. 11.

 

                      

              텃밭 쪽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곳에 가지를 심은 건 정말 잘한 짓입니다.

                집 밖에 나서서 제일 먼저 미소가 넉넉한 사람을 만나면 참 기분 좋죠.

                그 비슷한 이유입니다.

                제 키를 훌쩍 넘기고도 사방으로 기운차게 뻗어나간 모양새가

                언듯 아름드리 나무처럼 보입니다.

                속에 달린 가지까지 고루 햇살이 잘 스미도록

                굵은 줄기 겨드랑이에 나는 잔가지와 시든잎을 잘라주는 등

                아직도 온갖 공을 들이고 있어요.

                그러니 다를 밖에요.

                이번에는 가지를 무려 스무 개나 땄습니다.

                두어 개 꼬부라지고 벌레먹은 것 빼고는

                모두 매초롬하기가 강남제비 뒷태 뺨칩니다. 

                풀 베다 중간이 싹둑 잘려버린 고무호스가 여기까지 닿지 않으니

                말통 물조리개로 물을 길어와 듬뿍 줍니다.

                감사 인사지요.

             중간 냄비에 끓이면 딱 이틀 먹을 정도의 분량입니다.

               주말, 집 나갈 때 좋더군요.

               지난번에는 바지락 국물에 된장풀어 슴슴하게 끓였으니

               이번에는 올갱이를 넣고 끓여볼까 합니다.

               씨앗을 다 털어내고 봄인듯 다시 싹을 올리는 부추도 요긴하게 쓰일 겁니다.                

               힘내라, 상추야!

              꽃동무님이 주신 씨앗에서 나온 귀한 나리 새싹입니다.

               더 자라지도 시들지도 않고 마냥 이 상태에요.

               나뭇가지 꽂고 비닐이라도 씌워줘야 하나...

               안쓰러운 마음에 일하는 중간중간 흘깃 눈맞춤을 하게 됩니다.            

              흐드러졌던 고려엉겅퀴꽃이 시들자 기다렸다는 듯 쪽들이 꽃을 피웁니다.

                꽃대마다 여문 씨앗을 받아 다 심자면 이 텃밭 전체도 부족할 거에요.

                쪽씨가 필요한 분들과 나누면 좋겠죠. 

              먹고 살아야겠다, 몽땅 빼앗기진 않겠다, 벌레와 제가 첨예하게 대립 중인 배추밭.

               이것들 보호색 하나는 기막힙니다.

               비슷비슷한 옷을 입은 인파 속에서 월리를 찾아내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한 열 다섯 마리 잡았을까요?

               차마 죽이지는 못하겠고 배추고랑에서 가장 먼 텃밭 귀퉁이에 유배시키느라

               왔다리 갔다리도 열 댓번이라는 얘기죠.

               항우처럼 남아도는 힘에도 불구하고 전략이 어설퍼 그런가 초반부터 허리가 새큰합니다. 

               물호스로 덕지덕지 묻은 벌레똥을 씻어내며 나 항복하는 거 아니다!

               곧 돌아오마!

 

              그런 와중에도 차곡차곡 속을 채우는 기특한 녀석이 있어요.

               말썽 한 번 안 부리고 크는 속 깊은 자식같은 놈이죠.

               물어뜯겨 너덜너덜 거지발싸개가 다된 다른 배추 돌보느라 머리통 쓰다듬어 줄 새가 없었습니다 .

              드믄드믄 남기고 솎아낸 이후로 무는 빠르게 안정을 찾았습니다.

               이제는 벌레따위 공격에도 끄떡없어요.

               딱 제 다리통만하게만 자라주면 더없이 고맙겠는데 말이죠.            

 

 

           

              많으니 말려뒀다 묵나물로 먹어도 좋겠다 싶었어요.

               처음부터 한 입 크기로 썰어 말리면 나중이 편하겠지만

               바닥에 자리를 펴고 걷고 하는 것도 성가신 일이에요.

               열십자로 길게 칼집을 내 옷걸이에 걸었습니다.

               하루종일 해가 잘 드는 어르신 쉼터 뒷쪽 담장이면 말리기에 맞춤할 겁니다.

               옷걸이 두 개를 만들어 들고 나가자 2층 어르신 한 분이 볕바라기를 하고 계셨어요.

               뒤늦게 가지가 많이 달리네요.

               인사를 대신해 주렁주렁 가지가 매달린 옷걸이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지요.

               왜 혼자계세요?

               글쎄...아무도 없네?

               심심해서 햇볕이라도 쬘까하고 나왔지.

               잘하셨어요.

               베란다에 걸어둘까 하다가 들고 나왔어요.

               잘했어.

               햇살만 좋다고 잘 마르나요 어디? 바람이 들고 나고 해야죠.

               그럼 그럼.

               너무나 당연해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이지만 주고 또 받으니 따스합니다.

               착하고 순한 가을 아침 햇살처럼요.

               너무 뜨겁거나 차가우면 숨게 되고 끈적이면 불쾌하고 건조하면 불편한 게 사람 마음입니다.

               더도 덜도 말고 삭마른 어르신의 몸을 데우는 이 아침 햇살만 같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정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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