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어제 먹은 점심 메뉴도 아리아리한 판국에
그간의 일들을 기억 속 우물에서 퍼올리자니 힘이 좀 듭니다.
그럼에도 다행스러운 것은 부족한 기억력을 대신해줄 휴대폰이 있다는 것.
습관처럼 눌러댄 사진들과 잠결에도 끄적여놓은 메모들을 뒤적거립니다.
우선 열댓 포기 배추 수확을 하는 것으로 텃밭농사는 마무리지었습니다.
제법 살오른 무와 배추를 확인하신 형님은
제가 이 채소를 이용해 당연히 김장을 했으리라 여기셨던지
이제껏 주시던 김장김치를 그만 생략하셨습니다.
형님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저는 살아오던 방식 그대로
애써 김치를 담그는 대신 십시일반 사발농사에 열을 더 올렸습니다.
예서제서 들어온 배추김치며 알타리김치며 고들빼기김치로
어쨌든 냉장고는 가득찼습니다.
텃밭 터줏대감같았던 누런 호박 한 덩어리를 도둑맞은 것만 제외하면
올 텃밭농사는 대체로 흡족한 편입니다.
바로 옆에 있던 작은 녀석까지 따 패대기쳐놓은 건 조금 괘씸하지만
부디 맛나게 드시기바랍니다.
어느 하루 풀씨들과 서울에 있는 대형서점 한 곳과 근처 중고서점 투어를 했습니다.
쉽게 상처 받고 더디게 치유하는 딸을 위해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배르벨 바르데츠키를
춥고 쓸쓸한 겨울 앞에 선 나를 위해 백석시집을 샀습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첫눈을 기다립니다.
인사동 찻집 귀천의 진한 대추차맛은 변함 없었으나
실내 분위기는 이전과 많이 달라진듯 보였습니다.
걸쭉해서 더 뜨거운 대추차를 홀짝이며
오래된 영화 속 아네모네 다방을 연상했습니다.
안경을 쓰고나서 책읽는 것에 다시 재미를 붙였습니다.
굳이 쓰지 않아도 보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굳이 쉬운 길 외면할 이유는 없죠.
지하철에서 내려 나란히 놓인 에스컬레이터와 계단 앞에 서면
이제 고민도 않고 에스컬레이터에 탑승합니다.
더이상 자학에 가까운 도전과 인내를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풀씨 11월 첫주 필독서입니다.
추천도서로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들고나간 저는
소녀감성을 자극하기에 맞춤한 이책의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죠.
하지만 책을 펼치자 나타난 첫 문장이 케케묵은 제 소녀감성을 툭 건드리고 말았습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캬아! 어느 해 여름 고대산 중턱에서 반쯤 언 캔맥주 두어 모금을 들이키고 난 뒤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온 소리와 비슷한 감탄사를 회원들 중 제일 먼저 내질렀던 걸로 기억합니다.
안타까이 매달린 잎을 냉정하게 떼어내는 나무와 한줄기 바람편에 씨앗을 떠나보내는 풀꽃들로
온통 이별인 가을아닙니까.
속절없는 시간들 속으로 가을이 깊고 무겁게 가라앉고 있습니다.
언땅을 뚫고 복수초 노란 꽃봉오리가 빼꼼 올라올 때까지 내가 할일은 무얼까 생각합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말입니다.
막대모양으로 구운 과자에 초콜렛 옷을 입히고 그 위에 잘게 부순 견과류를 묻힌 수제 빼빼로에요.
카페 카도쉬 쥔장이 직접 만들었습니다.
빼빼로데이를 제과업체의 상술이네 아이들이나 하는 장난같은 기념일이네들 하지만
마음 한 조각을 담으면 이것도 소소한 즐거움이죠.
빼빼로 만들어놨다기에 성실한 수금사원처럼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이거라도 챙겨왔으니 망정이지 한보따리 받아온 남편한테 완전 꿀릴 뻔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실땅님과 서울 성곽길을 걸었습니다.
혜화문에서 숭례문까지.
바람 막고 볕 잘드는 길가에 계절을 잊은 꽃들이 피어 발목을 잡았습니다.
못이기는 척 주저앉아 눈 맞추고 예쁘구나 어루만지고 일어나
몇 걸음 걷다가 또다시 쪼그려 앉기를 반복하며
걸었는데도 두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