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가 끝나고 마른 볏짚도 공룡알로 변한지 오래,쇠기러기떼들이 빈 들을 차지했다.
물이 굽어 흐르는 곳은 살얼음처럼 보이지만 강은 거의 다 얼었다.
이대로 며칠만 바싹 추워주면 멋진 얼음판을 볼 수 있겠다.
속으로 흐르던 강물이 얼음장을 들이박으며 나직이 크릉크릉 소리를 냈다.
소리의 크기를 보건대 얼음의 두께가 얇다.
강에 살을 부비며 살았던 사람이라면 요 정도는 안다.
걷기 시작하고 얼마 뒤,우렁차게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은 곳으로 짐작이 되자 가던 걸음이 그만 얼음 땡.
멍멍멍,왈왈왈 혹은 캉캉 정도라면 몸집이 작은 개겠거니 하겠지만
크엉컹,기차 화통 삶아 먹은 목청으로 보아 무작스런 놈임이 분명했다.
지난 번 만났던,이름만 정다운 복길이, 그 불에 그을린 것처럼 생긴 녀석이라면...
기가 막혀 넘어갈 판이었다.
아 정말, 나 이런 거 정말 싫은데.
최대한 공포 수위를 낮춰 말은 했지만
속마음은 난 지금 두루미고 나발이고 다 됐고
당장 뒤돌아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고 싶다고...였다.
유사시 기어오르기 맞춤한 나무가 어딨나 눈알을 빠르게 굴리는 중에도
저 개삐리리가 이렇게 짖어대니 두루미 상봉은 물 건너 갔네 한숨이 나왔다.
다행히 얼마 지나 그 개의 집사인지 주인인지로 추정되는 남자가
복길인지 복순인지는 모르겠지만
뭐라 뭐라 외치면서 흥분한 개를 진압했다.
상황을 목격한 게 아니라 그건 짐작이고
어쩌면 개가 그 남자를 물고 혹은 몰고 갔을 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래서였을까.
여느 때에 비해 두루미 보기가 힘들었다.
많으면 내 탓, 적으면 개 탓.
잔가지가 유난히 많은 나무에서 작은 새들이 조잘조잘 수다판을 벌이다가
우리를 보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잽싸게 카메라를 조준하고 가지 끝에 앉은 새를 몇방 찍었다.
옆에 서있던 실장의 김새는 웃음 소리.
저건 새가 아니라 나뭇잎이야,바보야,한다.
눈 밝아 좋겠슈,길에 떨어진 돈이나 많이 주워보슈.췟!
먹이 활동을 방해하거나 더 나아가 잡아 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는데
어찌나 날서게 예민한지 안타깝다.
맛나기로 하자면 우리 동네 <돌고래 통닭>이 백번천번 낫겠구만.
더구나 나는 짝퉁 채식주의자라 눈알 박히고 날개 달린 생물은 먹지 않는다.
쟤들이 이런 사정을 좀 알아줬음 싶어서 주저리주저리 떠들며 갔다.
길은 율무밭을 가로질러 나있고 최대한 발소리를 죽인다 해도
절대 그 고도의 레이더망을 벗어날 수 없다.
먹다 말고 강 너머로 날아가버리는 두루미들에게 그저 미안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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