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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Book소리

식인종의 요리책

by 타박네 2011. 7. 3.

 카를로스 발마세다  장편소설 /김수진 옮김

 

'세사르 롬브로소가 처음으로 인육 맛, 그러니까 제 어머니의 살코기 맛을 본 것은

태어난 지 7개월 정도가 되었을 무렵이었다'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제 어머니의 젖꼭지를 잇몸으로 억세게 물어뜯어 잘근잘근 씹어 먹음으로써,(그것도 맛까지 음미하며)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장밋빛 입술의 토실토실한 젖먹이 아기가 바로 세사르 롬브로소다.

작가는 비극적인 사건 하나를 낚시줄 끝에 매단 미끼처럼 책 서두에 살짝 던져둔다.

자극적이다 못해 엽기적이다.

평소 조기흥분증까지는 아니더라도 호기심이라면 사춘기 사내아이 못지않은 내가

이걸 그냥 넘길 리 없다.

일단 덥썩 물고 본다.

그리고는 짐작컨데 곧 이어질 피의 향연, 그 탐욕의 만찬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런데 줄곧 이어지는 것은 군부독재와 내란,

폭력으로 점철된 아르헨티나의 지난 100년 역사 이야기뿐.

물론 레스토랑 '알마센'의 창업주인 카글리오스트로 쌍둥이형제에서 시작해

지상 최고의 맛을 추구해 온 롬브로소 가문의 영화와 몰락이

그 격동의 아르헨티나 시대 상황과 잘 버무려져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성질 급한 단세포 아메마 동물인 난,

지명도 사람 이름도 낯설어 잘 외워지지도 않는

아르헨티나 역사가 그저 지루하게만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진흙으로 빚어 만든 냄비에 오징어를 넣은 뒤 굵은 소금을 뿌리고,

옥수수와 순한 포도주,어슷하게 썬 파 뿌리를 넣고 끓이되,

그 사이 다른 도자 냄비에 잘게 다진 고기에 쪄낸 매운 해초를 넣고,

흰 후추와 오레가노를 뿌려 익혔다가 이 두 가지를 한데 섞은 뒤 약한 불에 은근히 끓여 만든'

이국의 지옥의 오징어 요리 따위엔 전혀 관심이 가지도 입맛이 다셔지지도 않는다.

 

내 고요한 휴식시간을 할애할 마음이 없어진 이 책을 들고 비가 억수로 퍼붓던 어느날

지하철 1호선에서 무심히 들고 앉았다가 마지막 피의 만찬을 보고 끝내는 경악하고 말았지만.

 

책장을 덮으며 떠오르는 또 하나의 인물.

영혼까지 사로잡을 향기를 얻기위해 수많은 소녀를 살해한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의 주인공 장 그루누이.

지상 최고의 맛을 얻기위해 인육을 요리하는 세사르 롬브로소와 참으로 많이 닮았다.

 

전쟁과 권력에 의한 폭력과 살인을 식인 풍습에 비춰

인간의 원초적 탐욕을 비꼬는 작가의 의도가 분명한 잔혹한 요리책이다.

 

아르헨티나의 정국은 육식문화를 부채질했다.

역사를 되짚어 보면,

각각의 시대별로 어떤 스타일의 음식이 유행했는지를 세세히 설명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결국 각각의 시기는 나름의 음식 문화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며,

유행하는 맛과 풍미는 늘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얼과 별개일 수 없음이 확인된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머리' 보다는 '위'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명료하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음식을 보면 시대적 열광과 두려움이 무엇인지,

결함과 문제점은 무엇인지,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혐오하고 집착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결점과 어떤 미덕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2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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