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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

안경을 쓴다는 것.

by 타박네 2013. 1. 5.

 미루고 미루다 얼마 전 드디어 안경을 맞췄다.

                안구건조증 치료차 안과에 간 김에 시력검사까지 했는데 의사 선생님,

                이 정도면 벌써 안경을 쓰셨어야지요,하신다.

                알고 있다.

                길가다 저만치 동네 어르신을 못 알아보고 지나쳐

                뉘집 며느리 저 싹퉁바가지 좀 봐라는 둥,

                우리가 서로 채권 채무 관계냐, 쌩까고 지나가는 건  어느 조직 시스템이냐는 둥...

                벌겋게 뜨고는 있으나 반봉사나 다름 없는 눈으로 인해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화를 만들며 살아왔다.

 그럼에도 내가 육식, 운전면허증과 더불어 줄기차게 안경을 거부한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긴 하다.

눈이 나빠 어렸을 때부터 안경을 써 온 남편에 이어

누가 그 아빠의 딸 아니랄까봐 너댓살 무렵 시력교정과 더불어

초롱한 두 눈을 안경으로 덮게 된 딸아이를 통해

일상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불편함을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 것은 스타일이 좀 구겨진다거나 욕 한 바가지 얻어먹는 것과는 급이 달라

나로선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요즘엔 라식이나 라섹 수술이 일반화 되어

                마음만 먹으면 까짓 안경 하나 벗어 던져버리는 거야 아무일도 아니게 되었지만

                그간 딸아이를 보며 느껴왔던 죄책감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한 뭉텅이 돈 다발이나 드넓은 전답은 못 물려줄 망정

 하다하다 몹쓸 유전자만 골라서 대물려 줬으니 말이다.

 

안경에 관한한 시집 가기 전 애 밴 처녀마냥 할 말 많던 내가

버티다 버티다 내 발로 안경점을 찾아간 것은

아주 사소한 욕심 때문이다. 

사람 얼굴 못 알아보고 저지른 실수에 따른 비난이나

남들 눈에 다 보이는

새끼손가락만한 노루귀 꽃이 유독 내게만 안 보여 허둥댈 때마다

               꼭 나오는 '마음씨 고약한 사람 눈'이 어쩌고 저쩌고,

               단물 빠진 껌처럼 잘근잘근 씹히는 것 까지는 참겠는데

               길에 떨어진 퍼런 지폐를 같이 걷던 친구가 먼저 발견하고

               잽싸게 주워가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결심했다.

 

노안도 아니고 조금 멀리 떨어진 사물이 잘 안 보이는 근시 정도인지라 안경은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만들어져 나왔다.

턱하니 안경을 콧등에 걸치는 순간, 오마얏, 놀래라.

저만치 멀뚱히 서서 날 지켜보던 남편 얼굴에 수박씨같은 점이 저리 많았던가?

둬 개 검버섯까지 또렷이 보인다.

영감님은 뉘 신가요? 하하하! 장난도 잠시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더 가관이다.

주름은 과장될 대로 과장 돼 마치 그랜드캐니언 협곡을 보는 것 같고

달 표면 분화구를 연상케 하는 거대 땀구멍들과 지구 중력 제대로 받아 축 쳐진 볼살까지.

 

으악,타박할매닷!

기어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몹쓸 걸 본 것처럼 드런 기분.  

또렷이 보인다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

                후다닥 벗어 안경집에 쑤셔넣는 것으로 잠시 빼앗겼던 십년 세월을 돌려 받았다.

                그 이후로 안경은 가끔 티비 시청할 때만 꺼낼 뿐이다.

                또 다시 내 세상은 희뿌윰한 안개 속이고 여전히 난 쌩까고 다니는 싹퉁바가지다. 하하! 

                이 없으면 잇몸이라고 흐릿한 눈 대신 이제부터 마음의 눈이나 초롱초롱 밝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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