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먼 곳에서 덩치 큰 바람이 으르렁 대며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성난 바람이 지상에 솟아있는 모든 것들을 물어뜯고 할퀴는 동안
나무들이 전기줄이 잉잉 울어대는 소리를 분명 들었다.
16층, 허공에 동동 떠 있는 불안한 영혼 하나도 밤을 꼬박 새웠다.
발광을 하던 바람이 지쳐 어디론가 사라진 어스름 새벽녘,
기절한 것처럼 잠깐 잠에 빠졌다 깨어나 창 밖을 보니
어? 앙큼한 것들.
말간 얼굴을 내밀며 밤새 아무 일도 없었단다.
증인 세 명을 못 세우면 그 귀곡산장의 하룻밤은 별 수 없이
할 일 없는 독거노인의 자작극으로 끝날 판이다.
이제 긴장과 공포로 소진해버린 에너지를 충전할 시간.
콩나물어묵국 끓이고 비름나물 무치고 버섯 볶고~
날 잡은 망나니처럼 쌍칼 휘두르며 한바탕 푸닥거리 끝에 차려낸 휴일 점심은 쌈밥.
지인들이 채취해 조금씩 주신 곰취며 참나물에 장터 할매에게 산 더덕순과 미나리가 푸짐하다.
어금니 사이에서 짓이겨지며 입안 가득 퍼질 푸른 향기를 떠올리니
보기만 해도 행복에 겨워 비식비식 웃음이 난다.
쌈의 포용력은 열두 자식 키워 낸 어머니 치마폭이다.
넓고도 자애롭다.
그 무엇이라도 마다않고 다 품어 안는다.
무엇보다 쌈 요리의 가장 큰 매력는 별다른 조리법이 필요치 않다는 것.
불 지펴 지지고 볶는 따위의 수고 없이 그저 흐르는 물에 설렁설렁 씻어 툭툭 물기만 털면
그대로 찬이 되니 세상에 이 보다 더 쉬운 요리가 또 있을까.
푸성귀 흔한 계절, 나는 무식하고도 전투적인 방법으로 채소를 먹어치운다.
가지가지 채소를 가능한 여러 장 포개어 쌓고 밥이나 남의살 같은 건건이는 아예 생략,
된장만 쿡 찍어 바른 뒤 그대로 우걱우걱 씹어 먹는 걸 무척 좋아하는데
옆에서 지켜보는 이들은 마치 괴기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경악한다.
고기 없는 쌈은 앙꼬 없는 찐빵이며 고무줄 없는 빤쮸고
꿀 없는 호떡이라 부르짖는 그네들 입장에서 보면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할 꼬라지겠으나
그 청량한 푸른 즙에 비명횡사해 서리서리 한 맺힌 남의살을 섞고 싶지 않은 것
또한 내 입장이다.
함께 살며 마누라 별별 희한한 꼴을 다 본 남편은 평생 채근하던 육식을 더이상 권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이가 들며 조금씩 꿈틀대는 내 삶에 대한 애착은
구차스럽게도 무엇을 먹어야 수명 연장이 될까로 이어진다.
요즘 나는 부족한 영양 성분 따지는 안 하던 짓을 하고 있다.
평소엔 나물이든 멸치볶음이든 잘 먹지 않는 반찬을 쌈 싸서 먹어치운다.
하지만 오늘은 그 남은 반찬도 없고 뭔가 푸지게 먹고 싶기도 하다.
나붓하게 썰어 살짝 데치고 잘게 쪽쪽 찢은 새송이와 파프리카를
식용유 휘익 둘러 볶다가 간장과 굴소스로 간했다.
불을 끈 뒤에 부추 한줌 넣어 뒤적거리고 참기름 찔끔.
성희가 집에서 만든 두부 으깨고
표고버섯 다져 왕창, 양파와 마늘 듬뿍 넣어 들기름으로 살살 볶다가
된장 고추장 섞어 다시 한 번 고루 볶아낸 두부쌈장.
잡식성인 남편을 위해서 꽁치김치조림을
눈 달린 생물 거부하는 별종인 나를 위해서는 들기름에 노릇하게 부쳐낸 두부전을~
이 때 두부는 한 입 크기로 작게 잘라 부쳐내면 쌈 싸 먹기 편하다.
상추 한 잎 깔고 그 위로
곰취, 미나리, 다래순, 참나물을 차례로 포개어 쌓은 뒤
고기 대신이나 고기보다 더 맛난 두부 한 조각과
버섯 파프리카 올리고 짜지 않은 두부쌈장 듬뿍~
봄이라서 행복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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