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장포 (돌창포)
따로 먹은 마음이 있어 휴일임에도 새벽부터 일어나 하늘 눈치부터 살폈다.
비가 온다.
지인으로부터 옆 동네 어디쯤 꽃장포가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노라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당시 큰 관심은 가지 않았다.
늘 그렇듯 집 근처 나지막한 산 경로당 코스나 살살 돌아다니며
옆집 딸 같고 뒷집 언니 같은 정답고도 낯익은 꽃들이나 일별하는 내게는
공들여 찾아가 알현해야 하는 도도한 꽃님들이 어쩐지 브라운관 속 김태희처럼 느껴져 현실감이 떨어진다.
하지만 어린 시절 깨벗고 멱 감던 그 강을 배경으로 단단한 바위에 안타까이 매달려 핀 순백의 작은 꽃이파리들,
기어이 지난 밤 깊은 잠을 방해하더니 아침이 될 때까지 현실로 남아있다.
김치찌개로 늦은 아침을 먹고난 뒤에도 소리 없는 음흉한 비는 부슬부슬 떨어진다.
다시 잠이나 잘까봐.
떨어뜨리면 발등 깨고도 남을 한숨까지 쏟아내며 우울증 말기 환자 시늉을 하자
일사후퇴 때 헤어졌던 혈육인양 애지중지 아끼는 티비 리모콘을 움켜쥐던 남편이 잽싸게 반응을 보인다.
한 바퀴 돌아볼까?
말 떨어지자마자 냐옹이 세수하고 똑딱이 챙기고 장화 신는 데까지 5분도 안 걸린다.
오락가락하던 빗줄기가 강가에 도착하니 딱 멎는다.
남편은 남 편일지 모르겠으나 오늘 하늘은 완벽한 내 편이다.
오래된 다리 위에서 매의 눈으로 이쪽 저쪽 살피고 그려준 약도도 떠올려 보며 깊은 고민을 하다가
결국 무식하게 마음 끌리는 쪽으로 간다.
앞서 모래사장을 겅중겅중 뛰는 내 모습을 보던 남편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그 풀이 그 풀인 그 널린 풀 보자고 풀숲 헤치며 돌아다니는 꼴을 봐 줄 수는 있어도
적극적으로 동참할 생각은 전혀 없노라는 사람이다.
그래도 이심전심, 내가 행복하니 그도 행복한가 보다.
이끼가 젖어 미끄러운 바위를 기어오르자 먼저 오신 진사님이 인사를 건내며 때가 조금 늦은 것 같다 하신다.
작품을 만들자는 것도 그림을 수집하자는 것도 아닌 내겐 이르거나 늦는 것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세히 보야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몸을 낮추고 머리를 숙여 눈 맞춘 뒤
꽃이 전하는 지난 계절과 바람과 비와 햇살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 뿐이니.
그렇게 꽃장포를 만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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