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앞산에서 한 뼘 쯤 올랐을 무렵 전화벨이 울린다.
먼 데 사시는 작은아버지다.
진숙이가?
상대를 확인하는 상투적 물음 한 마디에 질책과 그리움이 묻어난다.
니 요즘도 한 번씩 아프나?
어디서 묵은 소식 한 토막 주워들으셨나 보다.
늠들 보다 빨리 늙었어요, 제가. 노인성 질환이라네요.
허어,올해로 내가 일흔 하나다.
......
죄송해요.
건 그르코... 지금 내가 니를 잡으러 가믄 달아날 만치는 되나?
잡히지 않을 자신 있어요.
그럼 됐다. 내 드간다.
한창 미운 짓 많이 하던 열 두세살 무렵
당시 노총각이던 삼촌이 잠시 우리집에 묵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엄마한테 바락바락 대드는 걸 옆에서 지켜보던 삼촌이
마음 약한 엄마를 대신해 혼구멍을 내주겠다며 버럭 고함을 치셨다.
순간 어찌나 무섭던지 생각할 틈도 없이 대문 밖으로 냅다 뛰었다.
일단 눈앞에서 사라지면 불같던 화도 대체로 가라앉기 마련이다.
힘 센 형제들 틈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일찌감치 터득한 자구책이 뜀박질이다.
손자가 병법의 삼십육계 줄행랑은 아마도 나를 보고 지어낸 계책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죽어라 뛰었다.
딸기밭이 있는 골목을 돌아서며 힐긋 돌아보니
저승사자 얼굴을 한 삼촌이 팔을 휘두르며 달려 오고 있다.
그렇게 빨리 달린 건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싶다.
무대가 올림픽 경기장이었다면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거고
우사인 볼트와 기념 촬영까지 했을지 모른다.
끝내 잡혀 흠씬 매타작을 당했는지
어느 쥐구멍으로 숨어들어 모면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덩치 큰 삼촌과 날다람쥐 같은 조카가
고래고래 고함을 주고 받으며 돌담 골목을 지나고
역 앞 큰길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뛰어가는 영상만 또렷하게 남아있다.
적당히 엄포만 놓고 쫒는 시늉만 해도 충분할 것을
삼촌이 기어이 나를 잡겠다 달려오던 이유를 뒤늦게 알았다.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달아나면서도 아락바락 소리를 치더란다.
니가 뭔데,니가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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