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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Book소리

로맨틱 한시

by 타박네 2015. 12. 3.

로맨틱 한시라거나 로맨틱한 시라거나

아무렇게나 불러도 좋을 제목의 책이다.

한과 시 사이에 굳이 붉은 점 하나를 넣은 걸 보면

다분히 그런 의도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찬바람이 불고 눈발이 날리면 시집부터 집어든다.

땅 속 깊은 물 퍼 올리는 펌프에도 마중물이란 게 있듯이

긴 겨울 책과 벗하자면 우선

눈부시게 화려했던 지난 꽃계절의 잔상부터 떨쳐버려야 한다.

그리고 책을 펼치는 순간

수백 마리 개미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는 글자들을 모아

더께 낀 가슴 속으로 끌어들이기에는

짧지만 깊은 울림이 있는 시만큼 좋은 마중물은 없다.

 

사랑은 실종되었다에서 멸종 되었다 또는 소멸되었다며

극단적인 말을 서슴치 않았어도

사실 나는 여전히 사랑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그 옛날, 아주 오래 전 사람들의

은근하고도 애달프고 멋스러웠던 사랑이라면 더 좋다.

몇 해 전 우연히 알게 된 옛시 하나.

하도 절절해 수첩에 적어둔 적이 있다.

문득 생각나 검색해보니 이 시가 수록된 책이 있다.

로맨틱 한 시.

 

조금 먼 외출을 하려면 꼭 비 소식이 있다.

가뜩이나 겨울비는 을씨년스럽고 청승맞다.

천성이 변덕스런 내가 현관을 나서기까지

망설이지 않았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죽으면 썩어질 삭신 아껴 뭐하랴. 

스카프를 목에 친친 감고 양말을 두 켤레 겹쳐 신으며

주문처럼 외웠던 말이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서점부터 들렸다.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와 '로맨틱 한시' 두 권을 찾아들고 고민하다가

단지 표지 그림이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로맨틱' 한 권만 구입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다 입구 베스트셀러가 진열된 기둥에서

완역판'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보았다.

부담스럽지 않은 작은 크기에 표지 색도 참 사랑스럽다.

책장 어딘가에 오래된 책이 있을 테고

사들고 간다해서 당장 읽을 것도 아니겠지만

우선 몹시 탐난다.

손에 들고 있던 '로맨틱'을 그 옆에 세워두고는

'라임'을 한 권 집어들어  앞태를 보고 뒷태를 보고

이미 훤한 그 속내까지 주르르 훑으며 잠시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잠시 후 '라임'을 제자리에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서점을 나왔다.

 

나 만큼이나 뇌세포 사망 속도가 빠른 동생을 만나

칼국수를 먹고 차를 마셨다.

우리는 경쟁이라도 하듯 그간의 깜빡병 사례를 수다판에 늘어놓으며

풋, 허망한 웃음을 뿜기도 하고 발등 깨지게 한숨을 내리쏟기도 했다.

이런 게 경기 종목이었다면 당당 금은 메달을 받아 목에 걸고

어느 뒷산으로 목 메달러 가야할 판국이었다.

서글프고도 유쾌한 두어 시간이 흐른 뒤,

명백히 어딘가에서 분실했을 책을 문득 떠올리며

그날의 최종 승자는 내가 되었다.

늘 그렇듯

아주 중요한 기억의 필름은 결정적 순간 끊긴다.

계산을 마친 책을 오른 손에 쥐고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순간에서부터 '라임'까지,

그 짧은 연결 고리를 찾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언니, 아무래도 오늘 책 한 권은 엿 사 드신 거 같은데요? 

비관적인 그 예언은 다행히도 빗나갔다.

'로맨틱'은 내가 찾을 때까지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1.4 후퇴 때 헤어졌던 혈육과 재회한 양 감격하며 품고 온

로맨틱 한 시.

바로 어제 일이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달 비친 비단창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꿈속의 내 영혼이 자취를 남긴다면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겁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시인 이옥봉의 '몽혼'이라는 시다.

얼마나 그리워 님의 집 앞을 서성였으면 돌길이 모래로 변했을까.

꿈길에서조차 감히 문을 열고 들어서지 못해

발길을 돌려야 했던 그 애달픈 사랑.

책에 수록된 사랑을 주제로 한 삼백 여편의 옛시 중

유독 이 한 편에 마음이 먹먹해

깊은 잠 못 들었던 지난 밤.

그리고 오늘, 서늘한 마음 위로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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