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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밥상

나만 맛있는 저녁

by 타박네 2010. 4. 10.

꼭 밥상 앞에서 우거지 죽상을 하거나 깨작거려야 입맛이 떨어진 게 아니다.

요즘은 간혹 끼니를 걸러도 배가 고프지 않은데 생각해 보니 이건 심각한 식욕저하 증세다.

물론 그동안 애써 축척해 놓은 든든한 복부지방만 야곰야곰 꺼내 써도

석달 열흘 쯤은 가벼이 버티겠지만,

(마늘과 쑥으로 백일을 견딘 웅녀와 한 판 붙어도 이길 자신은 있다)

그리고 예전 같으면 앗싸리바아 만쉐 만쉐 만만쉐 외쳤겠지만,

아니다! 살이 빠져 이쁠 때는 딱 20대 까지고

가만보니 내 나이엔 지방 대신 근육이 모래사장에 물 빠져 나가듯

술술 빠져 나가 자칫하면 문어인간 되기 십상인데다가

"요즘 맘 고생하는 거 있어?"

"어디 아파?"라든가

좀 심하면

"왜 이렇게 팍삭 늙었어?"라는 직격탄을 맞기도 한다. 제길슨~

 

오십 평생 처음으로 뭘 먹으면 맛있을까 고민해 보기도 했다.

남의 살 즐기는 사람들이야 이런 말을 들으면,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단박에 마블링 환상의 꽃등심 참숯구이,

장작불로 24시간 고아내 양귀비 속살보다 더 뽀얀 설렁탕,

인삼에 게껍질, 심지어는 약이되는 뱀까지 먹여 키웠다는 오골계 백숙...이라고

말하겠지만.

 

할 말이 많겠지만 난 참 그렇다.

고작 떠오르는 음식이라는 게 솎은 상추와 강된장.

입이 미어지도록 크게 쌈을 싸 최대한 턱관절을 늘리고

두 눈을 부라리며 아귀처럼 씹고나면 마치 씻김굿 한 판 하고 난 뒤처럼

나른한 포만감과 위안을 얻기도 한다.

이와 이 사이에서 짓이겨지며 생기는 푸른 즙의 향기 또한 기막히고.

또 청양고추 미나리 부추 깻잎 송송 썰어 된장과 고추장 넣고 만든 장떡.

여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울타리콩 듬성듬성 박힌 막걸리 찐빵.

이건 꼭 우리엄마 솜씨여야하므로 이제 영원히 맛 볼 수 없는 음식이 되었다.

세상에 이렇게 겸손하고 소박한 입맛이 또 있을까.

 

지난 봄 채취해 말려 두었던 질경이 나물을 해 먹었다.

묵나물은 그다지 좋아한 편은 아니지만 망촛대나물과 이 질경이 나물만은 예외다.

어제 아침 영화 보러 나가면서 미지근한 물에 담궈 두었다가

저녁 때 끓는 물에 살짝 한 번 더 삶아냈다.

들기름과 집간장,소금, 파. 마늘을 넣고 조물조물 무친 후  살살 볶다가

마지막으로 거피한 들깨가루 두 숟갈과 깨소금으로 휘리릭~.

찔깃하면서 쫄깃하고 구수하면서 싸브름한 맛,끝내준다.

내친김에 마른 톳도 꺼내 성희씨가 준 잘 익은 된장과 고추장 넣고 무치고,

육수( 멸치 다시마 표고버섯 대파)에 이번에도

성희씨표 된장 크게 한 숟갈과 고추장 작은 숟갈 하나만  휘휘 풀어 넣은 봄동 된장국도 끓이니

얼쑤! 안드로메다에 개념과 함께 귀양 보냈던 입맛이 우주선 타고 돌아온다.

 

 

완성된 질경이 나물

소 여물도 아니고 무슨 맛에 먹느냐며 푸대접 받지만 내겐 녹용 산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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