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친책 빌린책 내책 / 윤택수 산문집
우리 집에서는 밀가루 음식을 많이 해 먹었다.
강낭콩을 넣고 찐 빵에서는 약간 쓴맛이 감돌았다.
사카린이 잘 녹지 않은 탓이었다.
빵을 반죽할 때 막걸리를 넣으면 더 좋았다.
막걸리 속에 든 효모들이 숨을 쉬면서 밀가루를 발효시키는 평화의 시간. 47p
이 익숙한 단어와 맛과 풍경이라니.
벗겨놓은 책 표지를 찾아 작가의 이력을 봤다.
이번에는 유심히.
61년생.
그랬구나...
무를 굵직굵직하게 채 썰어 넣은 무밥은 간장을 넣고 비벼 먹었다.
맵싸하고 달착지근했다.
맵싸하다는 것은 이를테면 한련의 잎을 따 먹을 때
입과 코의 점막이 총체적으로 체감하는 감각을 가리킨다.
나는 한련 잎으로 샐러드를 만들어 먹으면
온몸과 마음이 귀족처럼 호사스러워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늙어서라도 뜻하지 않게 작은 집을 사게 된다면
담 밑에 총총하게 한련을 심을 것이다. 51p
이미 조금 늙어버렸지만 나도 뜻하지 않게 내 등짝만한 꽃밭이 딸린 작은 집에서 살게 된다면
울타리 아래 총총총 한련을 심으리라.
삶에는 연습이 없다.
그 일회성은 경건하다.
삶은 누구에게나 어느 순간에도 멀고 험한 첫길이고,돌아가는 길은 없다. 63p
연습도 없이 이 정도고 당신들 정도면 천잰데?
우리 마음속의 꽃첩과 나무첩에는 별별 꽃과 나무가 다 들어 있다.
그 낱낱의 얼굴들에게 아는 척을 하면 그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사실은 우리도 꽃이고 나무이면서.
쬐그맣고 부질없는 무당벌레이면서. 72p
말한다는 것은 곧 거짓말한다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뜨끔!
누구의 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동부 꼬투리에 오글오글 모여 있는
진딧물처럼이나 많은 프랑스의 인문학자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한다. 190p
살아서 남들보다 잘살려는 것도 사악하거늘
죽어서까지 좋은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다니.255p
공상이라거나 망상이라 해도 좋으니 생각이라도 좀 하게 해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