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탄교와 강물이 보이는 이 자리가 내 전용 카페다.
그저 수다나 좀 떨자고 벗들이 나를 찾으면
이 강 언덕 공원벤치에서 만나자고 한다.
그런 뒤 소품 나부랭이나 담아두면 딱 좋을 바구니에
팔팔 끓인 물을 담은 보온병과 봉다리커피와 종이컵 등을 챙겨 넣는다.
바구니 달랑달랑 들고 곰보돌 계단을 내려가 짙푸른 칠엽수 그늘을 지나고
아직은 앙상한 계수나무 서너 그루 벌쭘 선 나무계단에 서면
다리를 건너는 차들의 소음과 강물 소리가 뒤섞여 한꺼번에 달려드는데,
바로 그 아래,
나무데크와 긴 의자가 바로 내가 찜한 전망 좋은 카페.
멋스런 가림막까지 있어 비 내리는 날도 카페 운영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휴일 아침,
티비 리모콘과 씨름하는 남편에게
커피 마시러 나가자 하니 웬일로 선듯 따라나선다.
내친김에 우리집과는 초등학교를 사이로 두고
건너편에 사는 친구도 부르라 했다.
댓바람 통화를 들으니
때마침 그 친구의 부인이 일찌감치 외출한 모양이어서
당구장 문 열기만 기다리고 있는 참인 것 같다.
맹맹이 콧구멍만한 커피바구니 들고 앞서 가는 내 뒤를
이제 영감이 다 된 심심한 두 남자가 졸졸 따라온다.
의자에 꽃무늬 손수건을 펼쳐 깔고
과자 몇 개와 따끈한 특제 봉다리커피를 내놓으니
두 남자 입이 쫘악 벌어진다.
역전 앞 자판기보다 훨~~
치마 두른 마담이 보자기에 싸들고 오는 순정다방 커피보다
훨훨~~~더 맛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급기야 인증샷까지 부탁을 한다.
한 남자는 외출 중인 부인에게 또 한 남자는 일 하러 가는 바람에
이 기막힌 커피맛을 못 보는 또다른 친구에게 깨똑을 보낸다.
잠시 후 동시에 답이 왔다.
강 언덕 벤치에 앉은 두 남자가 커피잔을 들고 헤벌쭉 웃는 사진을 받아본
또 다른 친구가 한 마디 하기를, 청승 떨고 있네.
친구의 부인은 단도직입적으로 아침 댓바람부터 커피 배달나온
그 잘난 마담을 좀 바꿔보라 한다.
전화기를 건네 받아든 내가 부러 비염환자 목소리를 내자
대번 알아듣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숨 넘어가게 웃는다.
혹 눈에서 질투의 불꽃이 튄 거 아니냐 물으니
일부러 그런 척 해 주는 거라며 킬킬거린다.
내가 계수나무 이파리를 주우러 가며
두 남자에게 다리 아래까지 산책이나 좀 하고 오라 했더니
자기들은 원래 여자 말이라면 일단 안 듣고
특히 마누라 말이라며 무조건 더 안 듣는 사람들이라며
궁시렁 대면서도 주섬주섬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시늉뿐인 산책을 마치고 다시 나타난 두 남자에게
부르시면 언제든 커피바구니를 들고 달려올 것이나
흙 퍼다 하는 장사 아니니 앞으로 공짜는 어렵겠고
신발 밑창 닳는 품값 정도는 받아야겠노라,
허나 남편 얼굴을 봐서 특별히 친구 할인가인 오백원에 모시겠노라 하자
동전 거스름돈 챙기는 것도 성가신 일일 테니
그냥 천원 한 장 주겠노라 통큰 선심을 쓴다.
대부분 다 학교 선배고 동네 오빠였던 남편 친구들을 비롯해
그 가족들과 평소 격 없이 지내니 이런 농도 가능하다.
농익은 산딸나무 열매를 따 남편에게 주며 먹어보라 했더니
무슨 못 먹을 걸 주는 것 처럼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별맛 나지는 않는다.
사흘 굶으면 꿀맛일 그런 맛이다. ^^
동그란 하트 모양의 계수나무 잎은 보기만 해도 즐거워진다.
초록일 때도 예쁘지만 단풍이 드니 볼그족족한 게 더 사랑스럽다.
떨어진 잎을 주워와 두꺼운 장식용 책 사이에 끼워 뒀다.
급히 말리고 싶다면 신문지를 덮고 다림질을 하는 방법도 있다.
어쩌다 내게 명함이 있느냐 묻는 사람이 있다.
그 때마다 나같은 백수가 명함 파 들고 다니면
지나던 개가 클클 웃습니다로 민망한 대답을 하곤 했다.
그 자리에서 얼굴 맞대고 번호를 부르면 휴대폰으로 받아적는 세상에서도
격식 차리는 사이에선 아직 명함이라는 걸 주고 받는 모양이다.
해서 나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일명 고품격엘레강스백수 명함.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수나무의 단풍잎을 주우며 떠올린 생각이다 .
딱히 하는 일도 없고 찬 완장도 없으니 구구절절 써 넣을 것도 없다.
마른 잎에 네임펜으로 간단히 연락처만 적었다.
지갑에 쏙 들어갈 크기라 맞춤한 데다 코딩을 해 책갈피로 써도 손색이 없다.
공들인 것이니 쓰레기통에 처박힐 확률도 적을 것이고,
나 이런 백수요~ 폼도 좀 날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