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소한 일상

길목을 서성이며~

by 타박네 2015. 9. 11.

         가을 문턱,

              하늘은 구도자의 눈빛처럼 깊어졌으며

              밤이슬을 피해 베란다로 숨어든 귀뚜라미 소리에

              나는 다시 밤잠을 설친다.

              대체로 내 가을은 낭만적이지 않다.

              최근 몇 해 순하게 넘어가던 알레르기 증상이 올들어 고약해졌다.

              질질 흐르는 콧물 닦아내랴

              시간 맞춰 안약과 인공누액을 들이부으랴 정신이 없다.

              나머지 시간은 독한 약에 취해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을 배회하거나

              단골카페에 앉아 몇백 년 산듯한 노인 흉내를 내거나...

              한점 바람에도 격정적으로 몸을 떨던 초록 이파리들이 퇴색하기 시작하고

              쑥부쟁이인지 구절초인지 아직도 구별 못 해 그저 들국화로 통칭하는 가을꽃들이

              작별의 시간을 이야기하면

              나는 명퇴를 코앞에 둔 직장인처럼 착잡하고 서글프다.

              늘 그랬다.

              

              엄살을 좀 부려도 괜찮을 만큼 바빴던 팔월을 보내고

              구월엔 취직이란 걸 해보려 했다.

              취업을 간절하게 소원한 건 결혼 이후 처음이다.

              평생 변변한 직장 한번 가져보지 못한 변변치 못한 중년의 여자가

              얻을 수 있는 직장이란 게 뻔하긴 하지만

              그래도 남들처럼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일 한번 해보고 싶었다.

              내심 기대가 컸던 자리 하나가 있었다.

              하지만 딸아이 말처럼 취업의 장벽은 만만치 않았다.

              실망.

              예전과 다를바 없는 백수의 가을 날이 사무치게 허탈하다.

              탱자탱자 노는 것도 하루이틀이고

              배운 도둑질이라고

              작은 방에 치쌓아둔 각종 염색재료며 바느질도구가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홧김에 서방질 한다고

              이참에 아주 저눔의 보따리들을 싸서 나가버릴까 싶은 마음도 꿈틀거린다.

              마당 있는 허름한 빈 농가 하나 구해

              바늘놀이 염색놀이 놀이터 삼을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을까마는.

              함께 놀고 싶은 친구들아, 오가다 맞춤한 빈집 보이거든 제보 바란다.

 

              딱 내 나이 되는 사람들만이 공감할 그렇고 그런 증세들로

              하루를 무탈하게 넘기기도 힘든 형편이다보니

              놀이터라는 멍석이 깔아준다 해도 그닥 오래 노닐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얼마 전, 경비실에 맡긴 택배를 여렵사리 찾아온 일이 있다.

              배달은 완료됐다는데 경비아저씨는 받아놓은 게 없다 하고

              참 미치고 팔딱 뛸 지경이었다.

              세 번째 다시 찾아간 경비실에서

              아저씨와 내 대화를 듣던 남편에 의해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그동안 나는 줄곧 거침없고 단호한 목소리로 남의 집 동호수를 대고 있었던 것.

              그때까지만 해도 집주소 명찰을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라는

              남편의 충고가 그리 뼈아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다시 며칠 뒤,

              유일하게 즐기는 개그콘서트 보던 중 집 나갔던 남편과 딸이 들이닥치며

              바보나라 여왕에 등극하는 사건이 또 벌어졌다.

              쓰고 있던 돋보기 안경을 벗어 어딘가에 뒀는데 그게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

              침대 밑을 살피고 쿠션과 이불을 들추고 털어도 나오지 않자

              마지막으로 딸아이 방으로 갔다.

              엄마 안경 못 봤어?

              아주 잠시 내 눈을 응시하던 딸아이 시선이 부스스 새집을 튼 머리통 위에 꽂힌다.

              혹시...엄마 바보 아냐?

              그 자리에서 돌아서자 화장대 거울 속에

              마치 왕관인양 안경을 사뿐 올려쓴 내가 보인다.

              바보, 맞다.

              십여분 뒤 개콘의 한 코너에서 딱 내 얘기가 웃음 소재로 나와

              다시 한바탕 뒹굴며 웃었다.

              속 편한 남편과 달리 나는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육신의 수명이 다하기도 전에 영혼이 먼저 죽어가는 것같은 이 더러운 기분.

              부디 바라건대 너무 멀리 가지 말고 돌아오라, 내 넋이여!

              나직이 초혼가 부르는 깊은 밤. 

                    

'소소한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0) 2015.11.13
다롱이 생각  (0) 2015.11.05
그 예쁜 말복이들는 다 어디로 갔을까  (0) 2015.08.12
후다닥 이박삼일 여행  (0) 2015.08.10
고장난 카메라  (0) 2015.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