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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

나이들면 덜 아플 줄 알았습니다

by 타박네 2016. 1. 19.

       여덟 아홉 살 무렵이었을까요.

        동네 가운데 하나 있었던 게 공동 수도였는지 우물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을 주민 대부분의 주 식수원은 여전히 강언덕 아래 약수였지요.

        제 손으로 밥 떠먹을 나이만 되면

        양동이 이고 물지게질하는 법부터 배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물지게일만큼은 시켜서 한 기억은 없습니다.

        다만 어린 마음에 발동한 효심이었겠죠.

        양철 물통 하나를 들고 강에 내려가 반쯤도 안 되게 물을 채워

        머리에 이고는 술췐놈마냥 휘적휘적 가파른 언덕을 올라오는 사이

        출렁출렁 그마저 반 넘게 쏟아지고 집 마당에 들어섰을 때는

        두어 사람 목 축일 정도의 물만 남아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도 딴에는 힘키는 일이었다고 목뼈가 주저앉아내린듯 얼얼했었습니다.

        내 키가 난장이 똥자루 겨우 면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가끔 억측을 하곤 합니다.

 

        용맹을 뽐내고 싶어하는 사내아이가 절벽에 기어올라가  

        바위틈에 핀 진달래 꽃가지를 꺽어 마치 그것 때문에 화가 난 듯

        여자 아이들 앞에 훽 던져놓고는 바람처럼 달아나던 봄날부터

        장작 한 단 불 때는 것과 비길만한 따가운 가을 햇살이

        강가 너럭바위를 따끈하게 데우던 초가을까지

        물지게 쉼없이 오르내리던 강과 언덕은 더없이 좋은 놀이터였어요.

        물론 겨울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썰매 한두 대 안 만들고 얼음배 서너 번 타보지 않고는

        강 언덕마을 사내아이들이라 말할 수 없었죠.

        여자아이들은 자그만 곰보돌을 쌓아 아궁이 비슷하게 만들어놓고는

        마른 풀들을 긁어와 불을 지피며 부엌놀이에 열을 올리곤 했었습니다.

        

        사내아이들이 머리에 화관마냥 덩굴잎을 감아 위장을 하고 

        작대기를 총삼아 바위에서 바위를 건너뛰며 돌격~전쟁놀이를 할 때도

        여자아이들이 커다란 바위에 번진 붉은이끼에 침을 뱉고는

        조약돌로 곱게 갈아 손톱에 바르며 메니큐어 놀이를 할 때도

        엄마들는 흐르는 강물에 머리를 감고 빨래를 하고 

        고운 모래로 놋그릇이며 양은 냄비를 닦고 있었습니다.

        칼바람 부는 겨울에도 절벽 사이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물이

        강물로 스며드는 자리는 얼지 않았어요.

        어느 날,한 광주리 빨래를 이고 강에 가신 엄마가 걱정스러운 저는

        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아 들고는 빨래터로 달려갔습니다.

        동네 아주머니 서너 분과 엄마는 얼음 조각이 둥둥 떠있는 강물에

        빨랫감을 흔들어 헹구기도 하고 방망이질을 하느라

        언덕을 내려가며  엄마,엄마 소리쳐 불러도 가까이 가도록 알아듣지 못하셨지요.

        아직 따끈한 물을 나눠 마시기도 하고

        벌겋게 얼어 곱은 손을 얼마 남지 않은 물로 녹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그때는 몰랐습니다.

        나이가 들면, 엄마가 되면 덜 춥고 덜 아픈줄 알았거든요.

        저는 그저 뉘집 딸내미가 이리 착하더냐 칭찬하는 소리가 듣기 좋았습니다.

       

        며칠 전 대단하지 않은 집안일을 하다 어디 모서리에 손등을 찧었습니다.

        오도방정 비명과 함께 훈장처럼 퍼런 멍 하나를 얻었죠.

        그 이튼날은 별 시답잖은 집안일을 하다가 왼손등에 멍 하나를 추가하게 됐고요.

        그리고 오늘 아침, 왼손이 미처 빠져나오지도 않았는데

        오른손이 붙박이장 문을 쾅 닫아버리는 바람에

        엄지 손톱이 벌개진 사건이 또 있었는데요.

        손가락을 감싸쥐고 후후~ 더운 입김을 불어제끼다

        정말이지 엉뚱하게도 그 옛날 벌겋게 얼어 퉁퉁 부어오른 엄마 손이 떠올랐습니다.

        사람도 나무처럼 세월의 더께가 굳은살이 되어

        가슴에 온몸에 갑옷처럼 덧입혀지며 나이 드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어지간한 충격이나 상처에도 의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프고 덜 아프지 않고 더러는 더 아픕니다.

        엄마도 참 많이 아팠을 겁니다.

        이제야 그 아픔이 느껴지네요.

       

        뜨거운 밀크티와 초콜렛으로 늙은 자해공갈단을 위로하는 무진장 추운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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