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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

주저리 주저리

by 타박네 2016. 1. 27.

옥수수빵을 두 개나 받은 날이었어요.

급식 당번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급우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빵이 그날의 당번에게 보너스로 돌아온 거였지요.

장담할 수 없는 기억속을 더듬어 보니 국민학교 저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자그만 손에 쥔 두 덩어리 빵으로 하굣길이 날듯이 행복했었죠.

 

늘 다니던 길이 아닌 강 언덕 오솔길로 접어든 것은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걸핏하면 넘어져 무릎 깨기 일쑤였지만

그날은 바람돌이처럼 달리고도 한 번 안 넘어진 날이기도 했어요.

단숨에 약수터 내려가는 길 근처까지 왔을 때

사람들 몇몇이 둥글게 서서 웅성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저씨 한분이 손사래를 치며 가까이 오지 말라 소리쳤지만

저는 이미 봐버렸어요.

길에서 조금 떨어진 우묵한 곳에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있었죠.

머리 맡에는 먹다 남은 술병도 있었구요.

음독 자살이었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시신을 본 날이었어요.

군복을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군인이라더군요.

시내 다방레지라는 여자의 한복 치맛자락이

바람에 팔락이던 모습이 지금도 또렷합니다.

두 사람의 얼굴은

돌맹이로 눌러놓은 공책 크기의 흰 종이로 덮여 있어 볼 수는 없었어요.

참 이상한 일이죠.

길 가다 조금 커다란 개만 만나도 사시나무 떨듯 겁을 내던 저였지만

그날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얼른 집에 가라는 어른들 야단도 무시한 채

멀찌기 쪼그려 앉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둘이 사랑하는 사이였답니다.

남자쪽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다네요.

부대에 연락은 갔으니 이제 금방 사람이 오겠죠.

기다리는 사람들이 올 때까지 저는

시신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 오가는 말을 듣다가 나란히 누운 연인을 보다가

언덕 아래로 서럽게 푸른 강물을 흘깃 보기도 했습니다.

먼저 남자가 들것에 실려 그 자리를 떠났어요.

여자는 홀로 남아 무언가를 더 기다려야 했었나 봅니다.

여자가 떠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저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 발걸음이 무거웠어요.

가방 속에 든 옥수수빵 두 개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면 저는 그러죠.

같이 죽어야,죽음까지 함께 할 수 있어야 사랑이라고.

어린 날 뇌리에 깊이 각인된 그 기억은

제 사랑의 의미를 그렇게 굳혀 놓았습니다.

자살을 미화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쓰고 버리는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처럼 가볍고 흔한 사랑을 볼 때마다

저는 오래 전 언덕 위에서 함께 생을 마친 연인을 떠올립니다.

제 첫사랑이 생의 마지막까지도 함께할 사랑일 수 있을까...

할 일 없으니 별 걸 다 고민하는 오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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