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너를 놓기로 했던 계획은 작은 플라스틱 창고로 축소되었다가
그나마도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당초 생각한 것 보다 빨리 밭을 비워줘야 할 사정이 생길 것 같은 게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로는 염색이든 놀이든 무언가를 하기 위한 터를 다지고 세우기까지
들어가는 기본 투자금이 예상을 훨씬 벗어나기 때문이죠.
어른 놀이터 만들자고 일을 확대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며칠 전 밭 한가운데 있던 수도를 이전했습니다.
그간 사용하지 않고 방치했던 탓에 단수조치 됐었는데
다시 연결하며 자리를 바꾼겁니다.
그런데 원하던 장소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옮겨졌더군요.
신청한 장소의 정 반대쪽 한귀퉁이에서 수도꼭지를 발견하고는
기막혀서 숨 넘어갈 뻔 했어요.
그쪽 밭 두 고랑에는 얼마 전 백도라지와 흰민들레와
꽃동무가 준 튤립 뿌리를 심어뒀습니다.
수도 이전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튤립의 파릇한 싹과 밭고랑은 흔적 없이 사라졌죠.
군데군데 흙더미와 함께 땅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온
돌덩이만 수북했습니다.
위치를 정확히 전달하지 못한 우리 잘못도 있는지라
뭐라 할 말도 없어 더 속상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수도꼭지가 있는 자리 주변을 정돈하고
비닐하우스를 올리기로 했던 2차계획도 다시 수정해야 해요.
지인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온갖 씨앗부터 해결하고
다시 고민해야겠습니다.
상추 한 판과 곤드레, 취,파,아욱,울타리콩,더덕씨와
염색재료가 되는 홍화와 쪽 그리고 꽃양귀와 수레국화
백일홍 채송화까지 씨앗이 넘쳐납니다.
뭘 심었더라? 헷갈릴까봐 숟가락 명찰도 만들었습니다.
정말 귀한 쪽씨입니다.
묵은 씨앗이라 싹이 잘 틀지는 모르겠지만 성공만 한다면
올 여름 생쪽 염색을 한 번 해 볼 수 있겠죠..
발효쪽의 기품있는 푸른빛과 달리
생쪽염은 파르스름한 빛깔이 말개서 참 좋습니다.
재료구입이 쉽지 않아 마음에 담고만 있었는데 드디어 씨앗을 구했어요.
쪽은 언듯보면 도랑이나 강가에 흔한 여뀌와 참 많이 닮았습니다.
흔한 여뀌에서도 푸른빛깔이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심어만 두고 여러 날 방치했더니 솔부추와 달래가 꼬들꼬들 말라가고 있습니다.
뭔 큰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서둘러 넘치도록 물을 뿌려줬어요.
말통 물조리개를 들고 몇 번 왔다 갔다 했더니 팔이 빠진 것처럼 아픕니다.
철망 울타리 밖에서 한심한 눈으로 내 모습을 지켜보던 어르신 한 분이 혀를 차며
호스를 사서 해야지 그걸로 어느 천년에 물을 다 주겠느냐 하십니다.
친구들이 지나는 길에 뜯어 먹기 좋으라고 출입문 바로 옆에 상추를 심었습니다.
상추모종을 사면서 토마토도 달라고 했더니 아직 나오지 않았다네요.
다른 건 몰라도 토마토는 종류별로 왕창 심을 참입니다.
기대해도 좋습니다.
씨앗이 날렸는지 밭 여기저기 삼지사방 흩어져 자라는 부추를 한군데 모았습니다.
지금은 가느리댕댕하지만 곧 잘라 먹어도 좋을 만큼 통통하게 자라겠죠.
아침 댓바람부터 나와 씨앗 한 봉지에 한 고랑씩 네 고랑 심었습니다.
허리를 펴고 숟가락 명찰을 꽂으려는데 뭔가 이상합니다.
호미질이 되어 있는 밭고랑은 세 줄 뿐입니다.
분명 뿌린 씨앗은 네 종류인데 말이죠.
꽃양귀비,수레국화,홍화 그리고 그 귀한 쪽.
그러면 네 고랑이어야 맞는 거죠.
이 어이없는 상황에서 미치고 팔딱 뛸 뻔했습니다.
한 고랑에 두 가지 씨앗이 함께 들어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한참 동안 넋놓고 앉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홍화와 쪽이라니...
홍화를 심은 고랑을 다시 파서 쪽씨를 뿌렸으니 어쩌면 좋아요.
이것들이 뒤섞여 손에 손잡고 나오면 그 때는 또 어쩌죠?
출입문 쇠봉에 머리통을 한 번 더 들이받던지 해야...ㅠ
아직 비어있는 고랑이 많습니다.
홍화와 쪽을 혼숙시켜 놓고는 망연자실 기운이 쏙 빠져 일단 철수했습니다.
춘사월이라고 노고지리는 우지지는데 저 사래긴 밭은 언제나 다 갈까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