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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일기

텃밭일기12

by 타박네 2016. 8. 12.

 

 

         키 낮은 양철문을 열고 살짝 고개를 숙인 다음 

             버릇처럼 오른 발을 들이미는 순간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눈앞에 펼쳐진 작은 초록세상.

             이제 더이상 채소와 풀은 구분 대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뿌리를 깊게 내려 더욱 푸르른 풀밭을 보면서도 한숨을 쉬지 않죠.

             더위가 한풀 꺽이고 무 씨앗을 뿌릴 때가 되면

             딱 필요한 만큼만 제초작업을 할 생각이에요.

             물론 제가 하지는 않습니다.

             넓은 이파리 뒤에 숨어 어느 새 늙어버린 호박과

             기생오래비처럼 매끈하게 쪽 빠진 가지와 허리 꼬부라진 오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붉고 노란 방울토마토를 따는 일은 노동이 아니라 놀이죠.

             이건 제가 합니다.

 

             늘 그렇듯 장바구니에 따 모으기 전에 촐촐한 배부터 채웁니다.

             그 사이 모기들도 제 종아리에 달려들어 만찬을 즐겼구요.

             치맛자락을 팔랑이며 들어간 게 화근이었어요.

             토마토의 단맛에 취해 할랑할랑 부채질조차 잊었습니다.

             오늘 물린 자리를 세어보니 열여섯 군데.

             물고 있는 자리까지 합치면 셀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벌겋게 솟은 상처마다 손톱을 세워 찍은 십자가로

             종아리는 아주 은총 넘치는 성지가 됐습니다.할렐루야!

             그래도 좋은 걸 어쩐답니까.          

 

              몰랐습니다.

               늘 이 골목 앞을 지나갔어요.

               여기서 넘어지면 코 깨질 자리쯤에 텃밭이 있습니다.

               고개를 살짝만 돌려도 보았을 거에요.

               이른 봄부터 이제까지 이 예쁜 골목 옆을 무심히 지나쳤죠.

               오고 가는 길 어디쯤,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데

               아직도 제가 못 보고 있는 무언가가 더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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