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합니다.
하루 한두 번 무언가를 애타게 찾아 헤매거나 그 무언가를 아예 잊어버리기도 하죠.
꼭 기억해야 하는 건 잊고 이제 그만 잊어도 좋을 것들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제 기억의 곳간에 새앙쥐 한 마리가 숨어들어
차곡차곡 쟁여둔 기억더미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어요.
쓰고 시린 것을 먼저 먹어주면 고맙겠는데 이녀석도 저와 별반 다르지 않아
입에 착 감기는 달달하고 따스한 것들만 욕심냅니다.
해서 불면의 밤, 허공에 떠다니는 단어들의 대부분은 서늘하고 아프죠.
그 서늘함과 통증은 맨발로 싸락눈 내리는 산길을 걷거나
굶주린 사자 무리에 둘러싸인 모습으로 꿈이 되어 나타납니다.
저도 대책없이 넋놓고 있지는 않습니다.
곳간에서 사라져가는 따뜻한 기억들을 채우려
그 어느 때보다 더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죠.
좋은 글을 읽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즐거운 일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가끔 길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풍경이나 사람은 더없이 좋은 수확물이죠.
어느 시인이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면
저는 그 수확물로 든든한 며칠을 보냅니다.
마른 눈발이 흩날리던 날이었습니다.
구터미널에서 출발한 53번 버스 안에는 승객이라야 저를 포함해 너댓 명 정도였죠.
초성리 다리를 건너자마자 할아버지 한 분이 벨을 누르고 일어섰습니다.
한눈에 봐도 몸이 많이 불편해 보였습니다.
카드를 꺼내는 주머니에서 천원짜리 지폐 몇 장이 버스 바닥에 떨어졌어요.
지팡이와 의자 모서리 손잡이에 의지해 간신히 버티고 선 할아버지는
어찌할 바를 몰라하셨습니다.
제가 주운 돈을 호주머니에 넣어드리자
인사 대신 늙어 그래요 하며 희미하게 웃으셨죠.
그때,자리에 앉아계세요 그리고 차가 완전히 서면 일어나세요
버스 기사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잠시 후 정류장에 차가 멈추고 할아버지가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섰습니다.
도와드려야 하나 망설이던 순간 운전석에서 뛰어내린 기사님이
출입문쪽으로 총알처럼 달려오셨어요.
문 아래서 기다리고 있던 기사님의 손을 잡고 할아버지는 안전하게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버스는 출발했죠.
그날 내밀고 잡은 두 손은 고스란히 제 곳간으로 들어가 빈 공간을 채웠습니다.
따뜻하게 말이죠.
밥하기 싫은 날 찾아가는 식당이 있습니다.
물론 늘 하기 싫죠.
게다가 반찬 만드는 것도 자꾸 까먹습니다.
예전에, 살림 재미나던 시절에 뭐 해먹고 살았나 싶습니다.
벌건 생태탕 국물을 넘기시며 시원하구나 하시던 어머님 음성은 남아있는데
그 특급 조리법은 도통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런 건 참 다행입니다.
모르는데 어쩌겠어요.
잘 하는 식당에 가서 사 먹어야지.
아무튼 하기 싫고 못 해서 먹으러 간 그 식당도 초성리 다리 근첩니다.
제 외식 삼종세트(불타는 낙지볶음,잔치국수,나물보리밥)중 하나인 보리밥집이죠.
보리밥집에서 굳이 쌀밥을 찾는 못된 버릇이 통하지 않는 유일한 식당이기도 하구요.
단일 메뉴라 먹을 사람 숫자만 대면 주문은 끝납니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주문을 마치고 화장실에 갔습니다.
화장실은 식당 현관문 왼쪽에 있는 좁은 통로를 걸어 들어가야 나옵니다.
해 저문 시간이고 조금 으슥하기도 해서 남편을 데리고 가 화장실 앞에 보초를 세웠죠.
누가 봐도 그저그런 식당 화장실에 반가운 물건 하나가 보였습니다.
작은 연탄난로였어요.
보온이 허술한 화장실이다보니 수도 동파를 염려해 설치해둔 거죠.
변기에 앉아 손을 뻗어봤습니다.
후끈한 열기가 그대로 전해집니다.
아이고, 어찌나 좋던지요.
불만 보면 그저 좋습니다.
불타는 로마시내를 보며 아름답다 눈물 찍어냈다던 네로황제가
제 전생이 아니었을까 싶기까지 합니다.
화장실 안에 잠깐 들어와보라 남편을 불렀습니다.
무슨 몹쓸 사태가 발생한 줄 알고 급히 문을 연 남편은 실소를 했죠.
저는 연탄 구멍마다 불꽃이 피어올라 절정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갈고리로 뚜껑을 열어제끼고 서있었을 뿐입니다.
연탄불을 보자 어머님이 노환으로 입원하셨을 때
같은 병실을 쓰던 어르신이 생각났는데요.
당시 그분은 중증치매를 앓고 있었습니다.
건강이 나빠져 요양원에서 잠시 모시고 나왔다는데
반나절 정도 함께 있는 동안 쉴 새 없이 외치던 말은 이거였어요.
불구멍 막아라, 아이고 저거 다 타네 누구 불구멍 좀 막아요 불구멍 좀...
처음에는 무슨 소린가 했죠.
요즘 아이들이라면 끝내 짐작조차 못 했을 테지만 저는 이내 알아들었습니다.
지금 어르신의 시계는 땔것 귀하던 시절에 멈춰 있고
아궁이 근처 남아있는 연탄은 겨우 한두 장,
아니 어쩌면 당장 갈 한 장조차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떡하든 공기가 들어가는 구멍을 막아 타들어가는 시간을 잡아둬야 하는 겁니다.
그거 잘 하는 사람이 제 새어머니였죠.
연탄 몇 장으로 춥고 긴 겨울을 난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리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좌우지간 밤낮없이 불구멍을 어찌나 틀어막아댔는지
제 방구석에 얼음이 서걱거렸으니까요.
안방은 예외였던 그 기록 도전은 제가 집을 떠나고 나서야 멈췄습니다.
그렇게 불구멍 사정을 잘 아는 제가 그 애타는 외침을 외면했을 리 없죠.
어르신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살짝 흔들며
할머니, 불구멍 꽉 막았어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제 말을 듣고 안심이 되어 이제 그만 편안한 잠에 드셨으면 하고 진심 바랐습니다.
예상과 기대는 곧바로 산산조각 났습니다.
어르신이 고개를 훽 돌리며 지금 거짓말 하는 거지? 했거든요.
무섭게 째려보면서요.
그때 놀란 생각을 하면 지금도 살이 떨립니다.
거짓말 했다가 된통 당한거죠.
거짓말은 치매노인도 눈치챕니다.
속을 거라 생각한다면 크게 착각하는 겁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며
너는 누구에게 단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더냐 묻습니다.
하지만 그 물음이 서글픈 사람들도 있죠.
미련이 될 거뭇한 점 하나 남기지 않고 훨훨 타올라
마침내 가벼운 육신으로 그곳을 빠져나온 뽀얀 연탄재 한 장이
사무치게 부러운 사람도 있는 법이까요.
한순간이라도 뜨겁게 타오르기를 열망하였으나
누군가 그 무엇인가에 의해 바람구멍 숨구멍이 틀어막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로 어둡고 우울한 시간의 터널에 머물고 있다면
연탄재라도 발로 걷어차세요.
그러셔도 됩니다.
차서 부수고 자근자근 밟아버리세요.
이왕이면 길 미끄러운 곳에서 하시는 게 더 좋겠지요?
조금이나마 후련할 즈음 행인들에게 고맙다 소리까지 들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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