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실종되었다.
찬바람은 꽃을 시샘하는 정도를 넘어 아예 골짜기에서 봄을 내쫓아버렸다.
다시 설국.
하늘빛이 심상찮았지만 차 안에서 보온병에 담아온 뜨거운 커피우유 한 잔씩 나눠 마시고 나와
뽀득~ 4월의 눈 밟는 기분은 가슴 찌르르 좋았다.
키 작은 꽃들은 어제 내린 눈에 거의 다 묻혔다.
서둘러 자란 박새 초록잎들만이 한때 이곳에 봄이 머물렀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눈 쌓인 사월의 숲은 경이롭고 잔인하다.
머잖아 홀아비바람꽃과 연령초가 흐드러질 산길로 들어갔다.
앞서 지나간 발자국이 흐트러짐 없고 분명해서 무작정 따라 걸었다.
발자국은 간혹 어느 지점에서 샛길로 빠졌다 다시 돌아오곤 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는지 그저 설경을 감상한 것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때마다 나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고르기를 했다.
사진을 찍고 더러 탄식하느라 뒷전에 밀린 일행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나는 줄곧 앞서 걸었다.
눈길에 선명하게 박힌 산객 발자국은 벌건 대낯 대로에서도 길치인 내게 고마운 이정표였다.
이제 나도 눈길을 걸을 때는 조심해야겠구나.
내가 남긴 족적을 따라 누군가 걸을 수도 있으니.
길 끝에서 우리는 발자국과 헤어져 반대 능선을 타고 올랐다.
작은 봉우리 하나 혹은 두 개를 넘으면 얼레지와 복수초 동의나물 꽃밭이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과 현실은 걸핏하면 다르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고 높은 곳에 올라서자 뻔한 도로가 불쑥 나타났다.
다시 숲으로 기어들어서니 거의 절벽같은 급경사.
아,정말! 나 이런 거 진짜 싫은데...
지그재그로 걸어라 썩은 나뭇가지는 왜 들고 다니냐 위험하니 당장 버려라 이리 오라 저리 가라
특전사같은 두 언니님들의 기운찬 잔소리가 산을 가득 메운다.
됐구요,빨리 가서 떡볶이나 해 먹읍시다.
악악거렸다.
대체로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이긴다.
이기고 지는 공식은 정해져 있다.
조금 더 너그러운 사람이, 더 사랑하는 사람이 늘 패자다.
자주 이기고 사는 나는 아주 가끔씩 참회한다.
그래서 다시 그 길.
가는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한 12시 16분.
꽃구경보다 더 기대가 컸던 점심시간.
즉석 떡볶이 한 봉지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어묵 추가, 삶은 달걀도 다섯 개나 퐁당.
라면도 넣느니 마느니 언니님들 실랑이하는 소리도 맛있게 들린다.
난 다 좋아!
그만 산을 내려가야 할 것 같았다.
눈은 쉬이 그칠 것 처럼 보이지 않았다.
가자!하던 그때 하필이면 모데미풀을 만났던 자리 근처에서 무언가를 찍는 사람이 보였다.
혹시? 우리는 한치 망설임도 없이 우비를 챙겨 입고 가드레일을 넘었다.
그 자리에 도착했을 때 그사람은 자리를 뜨고 난 뒤였다.
헌데 도무지 뭘 찍었는지 모르겠는 거다.
보이는 거라곤 풍요롭게 쌓인 눈 뿐.
그럼에도 꽃 한 번 찾아보겠다고 스틱으로 눈을 헤집으며 두 언니님들 용쓰고 계신 그때
나는 그늘양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손이 곱아 더는 전화기를 들고 섰을 수가 없어 예의 그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만나서'를 남기고 돌아서보니
우와! 찬란한 설국.
길가에 있던 차들은 어느새 다 내려가고 없었다.
이때부터 광덕고개를 내려올 때까지의 이야기를 허풍 좋은 내 썰로 풀자면 밤을 세워도 모자란다.
아름답던 눈은 사납게 낯빛을 바꿨다.
고갯길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일부 요령껏 빠져나가는 차를 제외하고는 다들 엉금엉금 기다시피했다.
그러다 급기야 경사진 길에서 더는 못 가겠소 하고 버티고 선 1톤 트럭과 에쿠스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속절없이 내리는 눈으로 세상은 온통 하얗다.
브레이크를 밟고 있는 실땅님 다리가 달달달 떨리는 게 보였다.
아마도 평생 살며 처음 당하는 일이었을 거다.
하필이면 주유등도 빨간 불.
여기서 밤 새면 얼어 죽는 거야?
아까 산행 중에 '그만 돌아가자, 아니면 또 산에서 119 부르는 사태가 날 수 있어'라고 한 내 말이 씨가 되면 어쩌냐.
눈물이 찔금 나려는 걸 꾹 참았다.
급한 마음에 차에서 내려 밀어 보고 당겨 보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나는 덩치 큰 차에 달라붙은 파리 한 마리 정도에 불과했다.
귀인은 두 번 나타났다.
앞서 나타나신 젊은 귀인도 참 애는 많이 쓰셨다.
자꾸만 옆으로 미끄러지는 우리차를 힘으로 밀어 방향을 바꿔주고 주변 교통정리도 하셨다.
하지만 결국 난감해하며 자리를 떠나셨다.
그리고 기적처럼 나타나신 두 번째 귀인.
몇 구비 길을 안전하게 내려올 때까지 차를 붙들고 따라 걸으며 실장님께 잘 하고 있다 용기도 주시고
사륜구동 차임에도 바퀴가 많이 닳아 있어 제동력이 떨어져 그러니 교체하라는 조언까지 살뜰히 해주셨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끝내 차를 버리고 몸만 내려왔거나 기막혀 죽었거나.
포천 사시는 정**선생님,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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