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소한 일상

허무하게 끝난 여름휴가

by 타박네 2018. 8. 29.

  느린섬 여행학교죠?

  22일이나 23일 ,묵을 방이 있을까요?

  빈방은 있습니다만 어떻게 오시려구요?

  완도에서 들어가는 배가 있던데요.

  태풍이 온다는데 배가 뜨겠습니까?

  아! 그렇지 태풍...

  급히 일기 예보 검색을 해보니 가까운 바다 가운데 태풍 솔릭의 왕방울 눈이 가히 위협적이다.

  이때 앞으로 닥칠 일을 예상했어야 했다.

 

  대체로 일 년 열두 달이 휴가나 마찬가지인 나와 달리

  직장에 묶여 살던 남편이 여름 휴가를 맞았다.

  휴가라는 건 늘 부대끼고 사는 것에서의 일시적 해방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남편이 직장에서 일시 탈출한 것처럼

  나도 직장이나 다름 없는 집에서 탈출해야 맞다.

  한량 비슷하긴 하지만 아직 공식적인 내 신분은 전업주부.

  각자 업에서 벗어나 각자 어디론가 떠나는 게 가장 바람직해 보이나

  가장의 무게를 훨씬 더 크고 가치있게 생각하는 나는 이런 경우 목소리가 작아진다.

  퇴직이 먼 얘기가 아닌 남편 입장에서 생각하니 의미 없이 허비할 휴가도 아니다.

  살금살금 떠나든 훌쩍 떠나든 여튼 떠나긴 해야 한다.

  지난 해 캐나다행 비행기 안에서 놀란 새가슴으로는 하늘을 날아 어디론가 가는 건 무리다.

  해외여행? 웃기고 있네.

  네 몸뚱아리는 딱 국내용이다라며

  안봐도 비됴로 한쪽 입꼬리를 밀어 올리며 비식비식 웃고 있을 친구 여운의 얼굴이

  고화질 영상처럼 그려지던 며칠 전 통화가 지금도 생생하다.

  뭐 하나 빠진 것 없이 다 가진* 입에서 그런 말 들으니 기분 더럽지만 인정!

 

  휴가 첫날, 소요산 근처에 새로 개업했다는 카페에서

  머리를 맞대고 앉아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보기로 했다.

  예술영화 상영관을 찾아 고전영화 관람하기,

  맛집과 북카페 탐방,

  그리고...음...

  남편과의 취미 공통 분모는 딱 거기까지다.

  마음같아선 이제 귀신 출몰하게 생긴 텃밭으로 끌고 가

  낫자루 던져 주고 며칠 강제노역이나 시키던지

  몸이 무기인 아줌마 둘도 은근 떨리는 으슥한 산길에 앞장 세우고는

  워이~ 우리 마누라 꽃구경 납셨다,길을 비켜라 외치게 하고 싶다만.

  그건 내 휴가지 남편 휴가가 아니므로.

  쉬라고 주어진 엿새가 무슨 어려운 숙제같다.

  육식만큼이나 치떨리게  싫은 게 또 숙제다.

  이럴 때는...안 하는 방향으로 아무렇게나 막 질러보는 거다.

  까짓꺼!

  걍 떠납시다.

  서해안으로 달리다 눈길 머무는 자리에 서고 먹고 자고,

  남해를 지나 동해안 바닷길을 돌아 돌아 옵시다!

  여름 휴가가 날마다 있는 것도 아니고 빨리 오라 보채는 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태풍이야 샤샤샥 피해 다니면 되고!

  그러지 뭐.

  남편의 대답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덤덤했다.

  혹시 저녁에 라면이나 끓여 먹을까로 잘못 들은 거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입은 그대로 가지 뭐, 말은 그래도 닷새 외박이면 꾸려야할 기본적인 짐들이 있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꺼내 갈아입을 옷이며 세면도구와 화장품을 챙기자 비로소 실감이 들었다.

  객짓잠이 길어지면 피곤하겠네...하다가 다시 화들짝 그까짓꺼!

  아무거나 먹고 막 쏘다녀도 잠자리는 조금 쾌적했으면 싶었다.

  첫 여행지는 목포.

  춤추는 바다분수쇼를 방에서 편히 볼 수 있다는 폰타나비치 호텔에 예약을 마쳤다.

  다음 날은 완도 그 다음 날은 청산도 로 대충 가닥도 잡았다.

  폭풍 검색질로 폐교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청산도 느린섬 여행학교를 찾아냈다.

  유네스코 세계농업유산에 등재됐다는 다랑논(구들장 논)도 보고

  영화 서편제 여주인 오정해가 너울너울 어깨춤을 추며 진도아리랑을 부르던 그 돌담길도 걷고

  밤이 되면 너른 운동장에 누워 별을 봐야지...했었던 건 일기 예보를 확인하기 전이었다.

  

  출발 전 아침,이미 오래 묵었지만

  엿새 뒤면 여지없이 음식물 쓰레기 봉투로 들어가야 할 반찬을 주섬주섬 꺼내 아침상을 차렸다.

  먹는 내내 음식물 처리기가 된 기분이 들긴 했으나 한편 개운하기도 했다.

  집을 떠나 차가 고속도로를 달리기 전까지 줄곧 하늘빛은 우중충 했고 간혹 비를 뿌리기도 했다.

  햇볕 쨍해 눈부신 것보다 훨씬 낫지?

  일단 태풍이라는 불길한 말은 입에 담지 않기로 했다.

 

  태풍은 어디 먼 나라 얘기처럼 목포의 바다와 하늘은 눈부셨다.

  곧바로 바지락전골이 유명하다는 식당을 찾아갔으나  하필이면 임시휴업.

  호텔에 여장을 풀고 내려와 근처 식당에서 낙지볶음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눈 감고 아무데나 찍어도 맛집이라는 도시다.

  볼거리는 둘째고 먹고 마시는 명소 정보는 차고 넘친다.

  나이들어 쪼끄라든 위장이 원망스러울 뿐.

  식사 후 디저트로 쑥꿀레를 먹었다.

  쑥찰떡을 조청인지 꿀인지 모를 달달한 국물에 넣은 간식이다.

  죽여주게 달아서 죽여주게 맛있는데 당뇨병으로 죽고 싶지 않아서 한 사발로 끝냈다.

  그때였나 보나.

  작정하고 나선 여행길에 뿌려진 찬물 한 바가지같은 전화벨 소리.

  통화를 마친 남편의 얼굴에서 난감함이 보였다.

  아무래도 돌아가야할 것 같아.

  태풍이 심상치 않네.

  오늘만 여기서 묵고 내일 아침 일찍 올라가자.

  올 것이 왔구나...

  사실 내내 불안했었다.

  실제로 그런가?

  불길한 예감의 정확도가 긍정적인 예감보다 높다는 거?

  맞는 것 같다.

 

  메모지에 정리해둔 목포에서의 일정이 바쁘게 됐다.

  다행히도 여름 해는 길고 바쁠수록 돌아가라 했다.

  바다가 보이는 스타벅스 이층 창가 테이블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부터 마셨다.

  하늘양이 카카오톡으로 커피 두 잔을 선물로 보내줬는데 사용 방법을 몰랐다.

  할 수 없이 주문을 받는 직원에게 슬쩍 휴대폰을 디밀었다.

  싫은 내색 없이 척척 해줘서 고마웠다.

  세상 참 좋아졌다.

  여기까지 왔으니 갓바위는 봐야겠지?

  호남에서 꽤 유명하다는 코롬방제과점에도 가고

  바닷가 포장마차에서 조개찜도 먹고 목포대교 야경도 즐기자.

  취소된 일정이야 다음에 이어서 하지 뭐.

  그래도 말야.

  내일 아침 일찍 담양에 아주 잠깐만 들렸다 가면 안 될까?

  명옥헌 배롱나무꽃이 한창일 텐데,그거라도 보고 가면 덜 서운할 거 같아.

  그래서... 그렇게 끝난 여름휴가.

 

  어제부터 줄기차게 비가 내리고 있다.

  정전과 침수 피해 소식이 들린다.

  이제 그만!

  가을 만나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갓바위

 

 

 

  해파리가 지천이다

 

  평화광장 스타벅스

 

 

 

 

  쑥꿀레

 

  목포대교 앞 신비포차

 

 

 

 

 

 

 

 

 

  목포대교

 

 

  춤추는 바다분수쇼

  폰타나비치호텔 7층에서.

 

 

 

  명옥헌

'소소한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년 인사  (0) 2018.12.31
자화상에서 찔레꽃까지  (0) 2018.11.26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0) 2018.04.06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는 것들  (0) 2018.02.13
안녕하신지요?  (0) 2018.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