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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Book소리

예순 여섯

by 타박네 2020. 12. 3.

설민석의 삼국지

 

책을 빌려 가슴에 품고 집으로 오던 길 중간쯤에 상여집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건널목을 지나 돌아갔을 테지만 그날은 마음이 바빠서 용기를 냈던 것 같다.

영웅호걸들의 기운을 받아 덜 무서웠을까?

아니면 끝내 뛰고 말았을까, 해묵은 기억은 소환해 보나 마나.

상하 두 권이었던 <삼국지>는 제법 묵직했다.

그 많은 인물과 전투와 내용을 다 이해하기나 했는지,

책을 돌려주기는 했는지,

중학교 2학년 때였는지 3학년 때였는지,

빛바랜 기억은 있으나 마나.

 

겨울엔 대하소설을 읽었다.

겨울밤과 대하소설은 동치미와 군고구마처럼 환상의 조합이다.

발원지에서 시작한 작은 물줄기가 제 몸을 불리고 수많은 생명과 이야기를 품고 흘러

기어이 망망대해와 마주하는 그 장엄하고 기나긴 여정이 주는 벅찬 감동과 기분 좋은 피로감,

역사 대하소설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이문열의 삼국지와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는

각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맥락도 같아서 삼포자(삼국지를 포기한 사람)지인들에게

만화 삼국지를 추천하곤 했었다. 

이제 또 다시 겨울,아직 눈알이 시릴 정도는 아니나

소맷자락이나 목덜미로 스멀스멀 기어드는 바람이 제법 맵다.

거므스름하게 변색된 아랫목과 푹신한 베개,걸쭉한 봉다리 커피와 대하소설의 추억.

토지, 혼불,태백산맥,아리랑,한강,장길산,삼국지,초한지...

토지와 혼불은 한 번 더 읽을 생각으로 처분하지 않았으나 그 밖의 책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리고 이십 년 가까이 다시 떠올리지 않았다.

십여 년 전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문열의 <초한지>와 김정산의 <삼한지>를 사들였다.

이 책들은 그 이후 십 년 세월 동안 책장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다 읽은 <워터 댄스>를 책장에 꽂아두고 잠시 그 앞을 서성거렸다.

긴 여행이 필요한 계절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삼한지는 표지를 쓰다듬어 먼지를 털고,

초한지는 패왕과 우미인의 마지막 작별 대목만 훑어보고는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아무래도 삼국지를 다시 봐야겠다.

이문열의 삼국지는 이미 읽었으니 이번에는 황석영의 삼국지로 가자 마음 먹은 다음,

중고책과 새책 사이를 갈등하며 검색질을 하다가 눈에 띈 게 이 설민석의 <삼국지>다.

 

삽화와 지형 지도,인물 관계도가 적절하게 들어있어 이해하기 쉽다.

물론 입담 좋은 작가의 글이니만큼 이야기의 전개도 시원시원하고 맛깔나다.

맛깔나는 건 좋은데,

나어린 독자들을 위한 배려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간혹 msg냄새가 과한 대화들이 있다.

나만 그런 게 거북했다면 예비 꼰대 인정.

두 권으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빠진 인물들과 이야기들이 많고

간혹 이전에 읽었던 내용과 뭔가 다르네 싶었던 부분들도 있다.

친절한 작가가 책의 말미에 그런 부분들에 대한 추가 설명을 달아놓았다. 

읽는 책이 아닌 보고 듣는 책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만큼 쉽고 편한 <삼국지>,

아직 삼포자인 지인들에게 추천한다.

 

 

 

최근 카페 주위를 배회하는 검정 고양이 한 마리.

소세지며 치즈를 주자 이제 아예 문 앞에 자리를 잡았다.

카사장이 이름을 지어보란다.

내 주특기인 성의 빠진 짧은 고심끝에 아메라고 부르기로 했다.

아메리카노의 아메.

아메야! 불러 가까이 보니 어라? 아메가 아니네?

가슴팍에 흰 거품이 풍성하다.

라떼라고 바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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