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비가 오락가락이다.
사랑을 하기에도 이별을 하기에도 그다지 좋은 날은 아니다.
하지만 시체놀이하듯 가만 엎드려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기엔 그만인 날씨다.
물론 오늘같은 날 읽으면 좋을 책이란 게 이런 추리소설을 말하는 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으면 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서 서로 어깨를 기댄 채.
(도종환,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중에서)
존 레논과 그리움이 가득 들어있는 시집과
세찬 빗소리가 프라이팬에서 지글대는 묵은지 김치전보다
더 유혹적인 오늘.
그래도 난 추리소설로 간다.
이 책을 받아든 순간 어디선가 본 듯한 표지그림.
앤디 워홀, 올덴버그와 더불어 1960년대 미국 팝아트의 대표작가로 불리우는
로이 리히텐슈타인(1923~ 1997)의 '행복한 눈물' 을 패러디한 것이다.
책을 읽기 전엔 의아했었지만 이젠 작가의 익살에 익숙해져 피식~ 웃음이 난다.
행복한 눈물 (유화. 1964년작)
추리소설에 대한 내 기대를 단숨에 날려버렸다.
이건 뭐 스릴이나 공포 따위는 약에 쓰자해도 찾아볼 수 없는 데다
꿈 속에서 님 본 듯 히죽히죽 웃음만 나온다.
목 없는 시체, 엽기적 토막 살인,
다잉 (Dying) 메세지 같은 으스스한 제목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표지 그림과 마찬가지로 셜록 홈즈 시리즈를 패러디한 듯한 이야기 구성,
추리 작가들을 향한 야유과 더러는 겁없이 독자들에게까지 조롱을 날리는
작가의 기발한 재담에 추리소설 탐독 사상 처음으로 큭큭 거리며 즐거이 읽었다.
추리소설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뿌리 깊은 고정관점을 일격에 부숴버리고
내 그런 기대를 다 타버린 담배꽁초처럼 밟아 비틀어 버렸지만 억울하지는 않다.
비틀고 뒤집다 못해 얼척없기까지 한 반전,
규칙없이 무질서한, 황당한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 또 찾아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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