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를 부탁했더니 몇자 끄적여 주는 게 귀찮았던 모양인지
어느날 불쑥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 세 권을 내민다.
요즈음 마땅하게 읽을거리가 없어 그간 미뤄두었던
역사소설 '삼한지'를 붙들고 씨름 중이었던 터라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일단 표지를 휘리릭 훑어보니 '옛날에 내가 죽은 집'
그 내용이 궁금해 미칠지경이 되기에 딱 좋을 제목에다
티비 속에서 느닷없이 머리 푼 여자가 기어나오는 영화 '링'의 그 장면보다
더 자극적이고 공포스런 표지그림.
바로 이런 걸 기다렸다.
다음으로 '성녀의 구제'
도무지 제목만으로는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없으니 또한 호기심 백 배 자극.
특히나 그 보다 더 성스러울 수 없는 여인의 그림 아래 띠지의 문구.
"당신의 말이 내 마음을 죽였어, 그러니 당신도 죽어 줘야겠어."
그래, 성녀에게 피맺힌 원한을 사 오뉴월 서리를 옴팡 뒤집어쓴 그 놈을 만나보자.
마지막 '용의자 X의 헌신'
사실 이 책은 '명탐정의 규칙' 이전에 처음으로 히가시노 게이고를 알게해준 작품이다.
추리소설을 읽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아려보기도 처음었던지라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얘길 듣고 내심 반가웠었다.
영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영화까지 보고 나서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란 노래를
몇 번이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미 읽었음에도 아무말 않고 받아온 건 이 책을 대여해 읽었기 때문에
집에 없기도 했지만 책을 건내는 그 마음을 고스란히 다 받아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욕심은 아니었다.
촌스러움의 대표격 내 것과 비교해 볼 때 참으로 세련된 그 분의 싸인.
옛날에 내가 죽은 집
등장인물 달랑 두 명.
장소는 외딴집 한 채.
시간은 단 하루.
7년 전 헤어진 연인과 자신의 지워진 어린시설 기억을 찾아
이제는 폐가가 되어 방치된 외딴집을 찾아가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공포는 바로 이런 것이다.
사방에 피가 튀고 살점이 튕겨나가는 장면 하나 없이
밀폐된 공간에 서서히 산소가 빠져나가듯 숨통을 옥죄는,
칠흑같은 밤 내 발걸음 속도에 맞춰 바로 등 뒤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듯한
한기와 섬뜩함을 읽는 내내 느껴야 했다.
기억에 남겨두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어 그 속에 자신을 묻고
영원히 지워버렸다면 그것이 바로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이다.
고통스런 기억과 함께 스스로를 묻어버린 무덤같은 집을
몇 채나 가슴속에 지니고 살고 있을까.
나는...
성녀의 구제
대부분의 추리소설은 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을 추적해 나가는 형식이지만
이 책은 처음부터 범인을 공개한다.
범인 뿐만이 아니라 범행의 동기와 도구까지 공개한다.
문제는 어떻게 그 완전범죄에 가까운 완벽한 알리바이의 틈을 찾아내는가에 있다.
옮긴이의 말에도 있지만
여자만이 가능한 감각수사 , 다년간 범죄현장에서 몸으로 범인들과 부딪쳐 왔음에도
여전히 인간적 갈등으로 흔들리는 한 형사의 정석수사,
그리고 물리학자의 과학수사가 총망라된 추리소설의 백미라 할 만하다.
용의자 X의 헌신
온몸에 외로움을 덕지덕지 붙이고 다니던 어느 수학자의 미련한 사랑.
그의 마지막 절규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