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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밥상

메밀부인 옆구리 터진 날

by 타박네 2011. 1. 28.

 

 

 

어제 신문에 이런 글이 실렸다.

왜 나이가 들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걸까?

심리학자들의 대답은 이렇다.

'회상효과'

기억할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내용이 많으면,

그 시기가 길게 느껴지고,

전혀 기억할 게 없으면 그 시기가 짧게 느껴진다.

 

이 '미친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하는 방법은 있다.

자꾸 기억할 일을 만들면 된다.

평소 뻔하게 하던 반복되는 일들과는 다른 것들을 시도하라.

 

이제 전투복(앞치마)을 입고 

주방에 서서 매일 지긋지긋하게 반복하는

그렇고 그런 메뉴에서 벗어나 색다른 요리에 도전장을 던져본다.

'김치메밀 전병' 

 

보름 전부터 냉장고 속을 신김치 냄새가 점령해 버렸다.

김치 전용 냉장고가 없는 탓이다.

김치냉장고. 참 할 말이 많다.

언제부턴가 집집마다 티비만큼이나 필수 가전제품이 되어버린

김치냉장고.

이젠 한 대로도 부족해 두세 대씩

전시장을 방불케하는 부엌 풍경이 더이상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조금 불편하고 부족하게 그리고 느리게 살아보자.

최소한의 가전제품을 제외한 티비와 전기밥솥, 전자렌지, 김치냉장고등을 

거부하면서 살아왔다.( 얼마전 티비는 장만 했다)

하지만 요즘처럼 이런 사태가 생길때면  단지 이 이유 하나만으로

이제 그만 버티기를 포기하고 김치냉장고를 확 들여놔 버릴까 하는

 갈등으로 곤혹스러워진다.

 

사실 예전처럼 대가족들이 북적이며 사는 것도 아니고

걸핏하면 외식에 배달음식에...

가뜩이나 장농만한 양문형 냉장고도 부족하단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특히 냉동실.

광고에 나온 것처럼 끝없이 빨려들어가는 '블랙홀'인가,

대쪽 같은 나의 '자존심'인가.

 

제철에 풍성한 식재료를 얼려 뒀다가

 귀한 철에 야곰야곰 풀어 놓겠다는 살림의 지혜가,

쌀 때 무더기로 구입 해서 두고두고 먹으면

훨씬 경제적일 거라는 알뜰함이,

대형마트에만 가면 떠오르는 무궁무진한 요리 아이템이,

(진열된 모든 것이 당장 꼭 필요한 식재료로 보인다)

냉동실의 풀리지 않은 빙하기 주범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내나름의 원칙을 세워 보았다.

아쉽긴 하지만 가능하면 제철음식은 그 때 많이 먹고

냉동은 삼가하기.

조금 비싼듯 하더라도 꼭 필요한 만큼만 조금씩 구입하기.

자라나는 아이가 아니라면 가급적 적게 먹기.

나이가 들면 신진대사율도 떨어지게 마련이어서 

적게 먹어도 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다.

그러자면 식탐 버리기.

 

이미 삼백 년 전부터 익어온 것처럼 냄새 요란한 신김치로

당분간 날마다 다른 음식을 만들어 보리라 결의를 다지면서

오늘은 메밀전병이다.

 

 

이 음식은 의료기관에서 일하는 지인 '실땅님'의 주특기다.

밤마실을 갈때면 후다닥 만들어 주곤 했는데

너무 늦은 밤이라 뱃살도 걱정되고

잠자리에서 속도 거북하지 않을까 주저할라치면

'메밀은 소화제나 마찬가지야' 라는 말로

모든 근심에서 해방 시켜 줄 뿐만아니라

더 나아가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되는 음식이라

는 신빙성도 없고 검증되지도 않은 말까지 서슴치 않는다.

 

(신김치를 이용한 메밀전병 만들기)

김치는 송송 썰어 물기를 꼭 짜 놓고 당면도 삶아 잘게 썰어둔다.

두부는 물기를 짜 마른 후라이팬에 살살 볶으며

남아있는 수분을 조금 더 날려 버린다.

이게 전부다.

속은 더 익히지 않을 것이므로 자극적인 파나 마늘은 넣지 않는 대신

고춧가루와 깨소금 ,참기름으로 양념을 한다.

 

(반죽)

메밀의 주산지 봉평산 메밀가루에 도토리가루를 조금 섞었다.

주르르 흐를정도로 묽게 반죽한 메밀전은

나같은 부침개의 달인도 찢어지지 않으면서도

얄팍하게 부쳐 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래서 쌉싸레한 맛도 좋지만 쫀득함이 더하라고

도토리가루룰 첨가했는데 이게 오늘의 화근이 되었다.

과유불급.

도토리가루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

이건 뭐 아주 메밀떡이다.

 

 

겨우 수습해서 접시에 올려 놓긴 했으나

아무리 봐도 식욕을 부르는 모양새는 아니다.

우리집 피오나,

그야말로 예의상 딱 한조각 먹어보고는 냉큼 제방으로 사라졌다.

귀신이 쫓아와도 그보다는 빨리 달아나지 못했을 거다.

 

 

수습전의 적나라한 실체는 이랬다.

꼬라지가 미친년 속고쟁이 같다.

요리전문 블로거인 비바리님의 격조 높은 메밀전병과

사뭇 다른 나만의 김치메밀전병.

이 맛을 물어 본다면 그것만은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

내가 먹어본 중에 최악이다. 하하하~ 

 

 

그래서,

내 저녁 식사는 다시 평소와 다름없는 채소 도시락으로.

콜라비와 파프리카 브로콜리등 각종 채소들을 아예 커다란 밀폐용기에

먹기좋은 크기로 잘라 담아두고는

끼니 땐 반찬으로 촐촐할 땐 주전부리로 먹곤 하는데

피오나는 이런 날  외계인 보듯 한다.

내가 괜히 소띠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