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두 시쯤,느지막이 출발했다.
바위가 많은 2코스로 올라 표범폭포가 있는 3코스로 하산.
시작부터 우리 실땅님, 컨디션이 좋지 않은지 많이 힘들어 했다.
그덕에 경로당 코스나 살살 다니는 내가 산 잘 탄다는 소리를 들었다.
칼바위 능선에 이르도록 꽃은 보이지 않는다.
꽃 없는 길에서는 멈춰 설 이유도 없어 터덕터덕 걷기만 하니 재미도 없고 지친다.
얼마 전까지 전기톱질 하는 소리로 요란하던 숲 속으로 하늘이 쏟아져 들어온다.
벌목이 끝났나 보다.
하늘 고인 자리에서
햇살을 받아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수많은 나비들의 유영을 보고 있자니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오래 전 꾼 꿈인지.
자주꿩의다리 군락이 장관인 칼바위 능선.
아직 개화 시기는 이르지만 성질 급한 한두 녀석은 메마른 꽃잎을 열었다.
정상 부근에 다다르자 금마타리가 보인다.
카메라에 두어 장 담았는데 와서 보니 빈대떡처럼 뭉개져 있다.
산 정상 데크에 걸터앉아 일단 폼부터 잡고
제법 '있어뷔는'카메라를 둘러맨 등산객 한 분에게 인증샷을 부탁 드렸다.
역시나 찍는 폼새가 능숙하고 편안해 보인다.
배경으로 탁 트인 철원평야가 환상적이었는지
본인 카메라로 한 컷만 찍어도 되겠느냐 정중하게 부탁한다.
뭐 뒷통수 빌려주는 것 쯤이야.
실땅님과 나, 팔자에 없던 고대산 모델 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예기치 못한 사고가 생겨
보람찼던 하루가 순식간에 악몽으로 변했다.
살다보면 별의별 일들과 다 맞딱뜨린다.
산전 수전 공중전...
나이 오십 넘도록 살아오며 겪어낸 전쟁만 해도 어디 한둘이던가.
더덕더덕 세월의 더께 낀 심장은
이제 어지간한 충격 정도는 개무시할 정도다.
하지만 대책 없이 뚫렸다.
무방비 상태에서 제대로 얻어터진 초강력 펀치 한방이다.
눈 뜬 봉사나 다름 없이 한치 앞도 못 보는 세상살이가 새삼스레 두려워진다.
다행히 수습은 잘 되었고
콩 볶듯 뒤척였으나 한소큼 눈 붙이고 일어나니 다시금 이전의 세상이 보인다.
평소 나는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을 비웃었다.
불행이면 불행이지 어설피 위로한답시고 끌어다붙인
되도않는 다행이란 말은 어쩐지 억지스러워 보일 뿐만 아니라
물에 기름 뜨듯 겉도는 느낌을 받곤 했기 때문인데 이제는 좀 알 것도 같다.
다행 중 불행과 불행 중 다행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왜냐고 묻지 말고 꼭 그래야만 한다면...불행 중 다행.
그게 덜 아프지 싶다.
십년감수 했다.
그래도 아직은 남는 장사다.
칼바위 전망대
고대산 정상 표지석 근처 바위채송화
꽃 피려면 아직 멀었을까?
숙은노루오줌
3코스 약수터
더이상 바랄 게 없었던 순간.